지역에서 본 세상/사람이야기

1950년생 황정둘의 경우

기록하는 사람 2019. 6. 17. 16:20
반응형

1950년생 황정둘. 우리 나이로 70세. 그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죽었다.

20세였던 엄마 이귀순은 지금 90이 되었다. 열일곱 살에 마산 진전면 곡안리로 시집와 정둘을 임신했을 때 남편 황치영을 잃었다. 남편 나이는 22세였다.

남편은 성실한 사람이었다. 열서너 마지기 농사를 지으면서도 멀리 고성의 저수지 조성공사 현장까지 막노동을 하러 다녔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고 7월초 진전지서에서 부른다며 집을 나선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내 지서 갔다가 저녁 때 (실안골에 풀어놓은) 소 찾아 오꾸마.” 이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1999년 기자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이귀순(당시 70세)


그가 지서에 불려간 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맹원이기 때문이었다. 흔히 보련원이라 불렀다. 이승만 정권은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정치적 반대자들을 일상적으로 감시·관리하기 위해 이 단체를 만들었다. 내무부와 법무부 주도로 만든 이 조직에는 정치적 요시찰 인물들도 있었지만, 황치영 씨처럼 실적을 위해 달콤한 말로 꼬여 가입시킨 경우도 많았다.


전쟁이 나자 이승만 정권은 이들 보련원이 북한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전국에서 예비검속(혐의자를 구속영장 없이 미리 잡아 가두어 놓는 일)을 시행했고, 마산·창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게 불려간 이들은 마산형무소로 연행되었다가 7월 말부터 매일 밤 구산면 원전마을 앞 괭이바다에서 수장 학살당했다. 황치영 씨가 살던 곡안리에서만 10여 명, 모두 1000여 명(1681명이란 기록도 있음)에 이른다.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가 없었던 황정둘은 홀로 남은 엄마의 정성으로 당시로는 드물게 고등학교를 나왔고, 결혼 후에도 남편과 함께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엄마를 모시고 산다.


지난 8일 괭이바다 선상에서 치러진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창원유족회 제69주기 합동추모제에서 황정둘이 마이크를 잡고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읽었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읽고 있는 황정둘(현 70세)


“2009년도 국가에서 진실규명 결정이 나왔을 때야 아버지가 학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억울한 것을 억울타 하소연 못하고 원통한 것을 원통한 것을 원통하다 말 못한 어머니의 그 심정 누가 알겠습니까? 아버지! 꿈에라도 나타나 한평생 아버지만 기다리며 사신 우리 어머니, 단 한 번이라도 사랑했노라고 안아드리고 업어주이소예.”

☞영상 보기 : https://youtu.be/nDBjsuHKmHk

이렇듯 유복자로 태어난 자식세대의 막내가 벌써 70이다. 1999년 내가 취재를 위해 이귀순 할머니와 함께 만났던 같은 마을 황점순 할머니는 노환으로 양로원에 계시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치매 증세가 뚜렷하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1세대 유족들마저 떠나고 나면 과연 이런 추모제가 계속 치러질 수 있을까? 그때도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해줄 이들이 과연 있을까?


2010년 이명박 정권은 민간인학살 진실규명 작업 중이던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중단시켰다. 지금 자유한국당은 이 위원회 부활을 위한 법 개정을 가로막고 있다. 그들은 ‘1세대 유족이 다 죽으면 자동 해결된다’고 믿고 있는 게 틀림없다. 실제로 그 믿음이 맞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참 슬프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