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사람이야기

진주사람들이 '어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식 #김장하

기록하는 사람 2019. 1. 18.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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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고등학교 2학년부터 대학교 4학년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선생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갔더니, 자기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니…."

단상에 불려 나간 문형배(53) 부산고법 부장판사는 목이 메어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청중이 격려 박수를 보냈다. 잠시 뒤돌아서서 눈물을 훔친 그가 말을 이었다.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으라고…(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것이 있다면… (다시 청중 박수) …있다면, 그 말씀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 강동옥(57) 경남문화예술회관 관장이 나왔다. "선생님은 진주오광대 복원과 진주탈춤한마당, 진주민예총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셨고, 극단 현장에도 전세금 3000만 원을 선뜻 내주셔서 지금의 현장아트홀이 있게 됐습니다."

문 판사와 강 관장이 말한 '선생님'은 김장하(75)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진주 남성당한약방 대표 한약업사이기도 하다.

16일 오후 7시 경남과학기술대 백주년기념관 아트홀에는 김 이사장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았거나 평소 그를 흠모해오던 사람들 120여 명이 알음알음으로 모였다. 사전에 전혀 공개되지 않은 모임이었다. 이날은 김 이사장의 생일이었다.

행사를 준비해온 홍창신 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되돌아보면 우리는 한 번도 그분에게 제대로 고마움을 표한 적이 없다. 더 늦기 전에 그이와 따뜻한 시간을 갖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워낙 그 어른이 낯을 드러내거나 공치사를 싫어하시는 분이라 미리 알게 되면 못하게 할 게 뻔해서 비밀리에 자리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날 참석자들은 모두 개별적으로 은밀히 연락을 받고 온 사람들이었다.

실제 그 시각 김장하 이사장은 전혀 이 행사를 모른 채 가족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식사 후 사전에 주최 측과 말을 맞춘 아들이 "좋은 공연이 있다"며 행사장으로 아버지를 이끌었다.

오후 8시 20분 김 이사장이 가족과 함께 행사장에 들어서자 큰 박수가 쏟아졌다. 무대 앞 벽에는 '김장하 선생님 고맙습니다'라고 적힌 펼침막이 내려왔다. 이어 생일축하 케이크가 나왔고, 참석자들은 축가를 합창했다.

사진 유근종

영상으로 '선생님이 살아온 길'을 관람한 참석자들은 노래패 맥박과 큰들의 축하공연, 전지원 양의 판소리 등을 함께 즐겼다.

이어 사회자인 윤성효 오마이뉴스 기자가 김 이사장에게 인사말을 청했다. 그가 무대에 오르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선생님, 고맙습니다"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무대 옆쪽에 있던 사람들은 큰절을 올렸다.

"아직도 얼떨떨하다"고 말문을 연 김 이사장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아직도 부끄러운 게 많다"며 "앞으로 남은 세월은 정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놀이패 큰들과 함께 노래 '만남'을 합창하면서 행사를 마무리했다. 큰들 단원들은 노래가 진행되는 동안 스케치북에 쓴 여러 카드를 대목마다 펼쳐 보였다.

"선생님이 걸어오신 그 길, 저희도 따라 걷겠습니다."

"돈은 모아두면 똥이 된다."

"똥이 거름 되어 꽃이 피었습니다."

"여기 진주에 꽃이 피었습니다."

"진주사람 웃음꽃이 피었어요."

"선생님이 계셔 든든합니다."

"선생님 늘 건강하십시오."

"♡♡♡참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문형배 판사의 눈물로 시작된 행사는 모든 사람의 행복한 웃음으로 마무리됐다.

16일 진주 시민사회가 마련한 김장하 이사장 깜짝 생일잔치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유근종

'진주의 어른' 김장하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은

자신의 깜짝 생일잔치에서 활짝 웃는 김장하 이사장. /유근종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습니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핍니다."

김장하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의 말이다. 이 말대로 그는 평생 나눔을 실천해왔다.

100억 원이 넘는 사재를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키운 후 무상으로 국가에 헌납했던 일도 그렇고, 진주지역의 각종 문화예술단체나 언론·역사·환경운동 등 시민사회 전 영역에 걸쳐 지원을 해왔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와 진주문화연구소는 직접 설립에 앞장섰고,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장학사업도 꾸준히 해왔다. 문형배 부산고법 부장판사도 그 장학생 중 한 명이다.

지금은 폐간됐지만 시민주주언론으로 창간된 <진주신문〉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폐간 당시 마지막 이사회의 일원으로 참석했던 이철조(건축사) 씨는 "당시 정산을 해봤더니 무려 10억 원에 이르는 운영자금이 김장하 이사장에게서 지원된 것이었다"며 "그래서 일부라도 돌려드려야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일언지하에 '받으려고 준 돈이 아니다'며 손사래를 쳤다"고 회고했다.

1991년 8월 명신고등학교를 헌납한 후 열린 이사장 퇴임식에서 그는 나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배우지 못한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1944년 경남 사천의 지독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도 간신히 졸업했다. 친구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그는 삼천포의 한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틈틈이 공부해 19세에 최연소의 나이로 한약종상 면허시험에 합격했다.

1963년 사천 용현면 석거리에서 한약방을 열었고, 명의라는 소문이 나면서 전국 각처에서 그에게 약을 지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973년 진주시 동성동으로 남성당한약방을 옮겼고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당연히 재물도 쌓였다.

그러나 그는 평생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았고 사치를 멀리했다. 웬만한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먼 곳은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집도 따로 없다. 한약방 건물 3층이 집이다.

명신고등학교 이사장으로 있던 당시 전교조 해직사태가 터졌으나 정부의 압력에도 단 한 명의 교사를 자르지 않았다.

그는 또한 자신을 내세우는 일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래서 지금껏 단 한 번도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는 지난 2016년 그의 이야기를 한 대목으로 다룬 <별난 사람 별난 인생>(도서출판 피플파워)를 출간한 후 인사차 그를 찾아뵌 적이 있다. 독서를 많이 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많이 부족하니까 많이 읽을 수밖에."

글 김주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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