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사람이야기

진주 김장하 선생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

기록하는 사람 2016. 8. 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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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추가될 예정입니다. 김장하 선생에 대한 여러분의 기억이나 추억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댓글로 올려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이인안 어릴 때 저희 동네에서 한약방을 했어요 당시 사천군 용현면 선진리 흔히들 '석거리'라고 불렀던 곳. 언제부터 거기서 한약방을 했는지는 모르겠고.. 진주로 한약방을 옮긴건 제가 초등 4~5학년? 암튼 어릴 때부터 워낙 훌륭한 분이라는 얘길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어 우리는 거의 세뇌수준^^

김장하 선생님이 장학사업을 하기 전이니 그 전 한약방을 운영하면서부터 그 인품과 실력이 모든 분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릴 적 넓은 마당이 있던 석거리 남성당 한약방은 우리들의 놀이터였습니다 마당이 넓고(물론 초등학생의 눈높이) 항상 먹을 것이 많아 틈만 나면 친구들과 그 집에서 놀았습니다. 물론 약을 지으러 온 분들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인근 진주는 물론이고 어린 나이에 들어보지도 못한 곳에서 멀리 약 지으러 왔던 기억이 납니다.

마당에 큰 솥이 걸려 있었는데 기억해보니 멀리 서 오실 분들이 대기 번호를 받고 약 짓는데 오래 걸리니 거기서 밥도 해결한것 같습니다. 그래서 먹을 게 항상 많았고 그게 동네 애들에게도 혀택이 돌아오는 긍정적 순환구조^^ 암튼 어릴때 기억은 이 정도입니다. 또 생각해 보겠습니다...



경상남도과학교육원 권상철 1993년 1월경, 진주교육대학 4학년이 되었을 때 신입생들에게 청년예비교사로서 우리 사회와 교육 현실에 관심을 갖게하려는 마음으로 <신입생 예비대학>이라는 1박2일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준비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오리엔테이션이라고 해서 하루 낮동안 오전에는 대학 당국이, 오후에는 총학생회가 대충 소개하는 자리로 끝나고 마는 자리였습니다.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시기라 준비과정에서 학교 당국과는 소소한 갈등이 이어졌지요. 

행사 이틀전까지 학교 내 강의실 숙박(당시 돈없는 대학 행사에서는 일상이었음에도)을 빌미로 교수님들의 완고한 반대와 징계 엄포가 있고, 가난한 대학생들인 우리에게는 행사를 치를만한 돈이 없어 이중고를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제가 진주동명고를 나왔기에 당시 명신고 설립자인 김장하 선생님의 훌륭한 인품을 종종 들었던 터라 남성당한약방으로 무턱대고 찾아가서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당돌할 정도입니다. 소규모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한다는 앳된 한 대학생을 맞이한 선생님은 환자를 보시던 바쁜 중간에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봉투 하나를 건네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도대체 무엇을 믿고 주셨을까요? 

금액은 크지 않았지만 지역 어른께서 주신 것이었기에 마음으로는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당시 학생처장이던 권정호 교수님께서 마지막까지 저희들과 대화를 하시며, 징계를 운운하는 교수님들로부터 보호하여 주심으로써 엉성하기만 한 우리들의 <신입생 예비대학>은 정말 많은 학생들의 참여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경남교육계에서 수여하는 가장 큰 상인 <경남교육상> 이야기가 나올 때 김장하 선생님께 왜 주어지지 않는가 한 번 물어보았더니, 그 분은 이런 상을 갖다 바쳐도 사양하시는 분이라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어쩌다 남성당한약방을 지날때면 20년도 더 전에 앳된 젊은이의 마음을 안아주던 지역의 큰 어른을 기억합니다. 늘 마음에 고마움이 남았는데, 여기 작은 기억을 털어놓으니 조금은 빚을 갚은듯 합니다.^^ 



안차수 대학 졸업 때까지 만성적인 위장병을 앓았다. 한 때 심해서 6개월간 공부를 쉬기도 할 정도로 좋지 못했다. 온갖 약을 먹어도 보고 병원도 다녔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나중에 장모가 된 분이 나의 상태를 듣더니 딸에게 한약 1첩을 들여 보냈다. 아프던 위장이 거짓말 처럼 편안해 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남성당의 단골이 되었다.

20여년간 내 속을 책임진 한약방이었는데, 선생에 대한 얘기는 그저 '수수한 분' 정도로 알 뿐이었다. 몇 대째 내려오면서 '약값을 올리지 말라'는 얘기, '병약은 특히 저렴'하게 해서 아픈사람이 돈 때문에 약을 짓지 못해서는 안된다는 훈훈한 얘기 정도였다.

경남도민일보의 소개로 '아!, 이런 분이었구나' 한 대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 분을 잘 몰랐지만, '내 속은 이미 알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한테 장학금을 받은 학생만 장학생이 아니다. 약을 먹고 공부를 하게 된 많은 사람들도 그분의 장학생이다. 나도 그 중 한명이다. (2016년 8월 3일 추가)


Gyu-Seok Jung 제가 명신고등학교 1기 졸업생입니다. 그당시 등교할 때 시내버스 안에서 이사장님을 뵌 적이 많습니다. 김장하 이사장님은 늘 먼 거리를 자전거 아니면 시내버스만을 이용하면서 다녔습니다. 전혀 권위의식 같은 것이 없었기에 명신 동문들은 이사장님을 항상 존경하고 있습니다.^^

Gyu-Seok Jung 네. 선배님. 명신 동기들은 단 한명도 빠짐없이 지금도 김장하 이사장님을 최고로 존경하는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Gyu-Seok Jung 문형배 판사는 대아고 출신입니다. 그 당시에 이처럼 김장하 이사장님은 명신고 재학생 뿐만 아니라 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사재를 털어 많은 지원을 해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Gyu-Seok Jung 명신고 3학년 때 대입체력장 하던 때가 생각납니다.동명고 운동장에 가서 했던 걸로 기억나는데 김장하 이사장님이 양손에 박카스를 무겁게 직접 들고 학생들을 찾아왔습니다.

박카스가 많든 적든 거기에는 눈이 가지 않고 허름한 양복을 입고 손수 박카스를 들고 우리 학생들을 격려하러 찾아왔을 때, 그 당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체력장을 하던 명신고 3학년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박수를 쳐 드렸습니다. 선생님이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모두 자발적으로 일어서더라구요. 학생들 마음 속에 이미 존경심이 가득 담겨있었던 것 같습니다.

Gyu-Seok Jung 사립 명신고등학교 당시에는 김장하 이사장님이 사재를 털어서 최신 인쇄기계를 학교에 들여왔습니다. 시중 서점에서 파는 거의 모든 참고서와 문제집을 전교생에게 매일같이 복사(인쇄) 해서 나눠주었습니다. 엄청난 양의 종이가 인쇄되어 전교생에게 배부되었습니다.

사실 요즘같으면 불법복사니 저작권 침해니 해서 법적으로 많은 문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즉 명신고 재학생들은 시중에 나오는 거의 모든 참고서와 문제집을 복사본으로 다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마 매일 같이 나눠줬던 프린트 물량은 돈으로 따지면 상상도 못할 액수가 들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 많은 돈을 이사장님은 사재를 계속 털어가며 대줬던 것입니다. 사립명신고등학교 학생들이 다른 학교 학생들보다 우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2016년 4월 28일)



성순옥 제 아들도 명신고등학교 졸업생. 시험잘치는 기술이 부족해서 성적등급은 낮았지만 그런 것 게의치않고 홍보부장, 축제 사회 멋지게 했고, 좋은 친구들 멋지게 사귀며 잘 놀다 왔으니 ㅡ아들 말 임.

공부 좀 못한 거 절대 후회 안한다나요.ㅎㅎ 아이들 사고를 자유롭게 해주는 학교? 교복을 안 입어서 정말 좋았어요.

그리고 이분이 설립자여서 더더욱 자랑스러웠네요.

김주완 학부모 입장에서 본 명신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은 공립 전환 이후겠죠?

좋아요 · 답글 달기 · 1 · 4월 28일 오후 9:44

성순옥 예, 그래도 그 여운이 있잖아요.



이철조 진주는 김장하 선생님같은 분이 계신것 만으로도 살만한 좋은 동네입니다.

명신고등학교등 교육사업.장학사업 초기에 정말 어려울때 극단현장 노리패큰들등을 후원 문화사업 진주신문창간에서 운영까지 십수억을 출원하셨고 환경운동연합 지리산생명연대 진주여성법률상담소등 시민사회단체도 역할과 도움을 많이주셨고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셨습니다

이루 말할수업이 많은 역할을 하셨지만, 진주시민의 대부분은 알 수 없는 조용한 역할들이였습니다



최승제님이 회원님의 사진을 공유했습니다.

4월 29일  

저희 모교 이사장 이시죠~. 사립 고등학교를 설립하고 8년만에 은행빚을 다갚고는 국가에 헌납하신분~. 그래서 사립8기로 입학했다가 2학기에 공립 고등학생이 되기도 했죠^^

그당시 사립 선생님들은 3년에 걸쳐서 모두 명신을 떠났다가 추후 원하면 다시 들어오게 되었죠... 신생 고등학교에서 자신들의 30대를 불태우신던 선생님들은 이사장님의 숭고한 뜻을 헤아리면서도 정든 학교와 학생들을 떠나는 게 아쉬워 눈물을 흘리시는 분들이 많으셨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이사장님의 사회환원을 멀리서 듣기만 하다가, 진주로 다시 내려온 2008년부터 그 사이에도 이사장님의 변하지 않은 지역사랑, 나눔의 정신을 접했습니다. 정말 쉽지 않죠...

그러던 와중에 경상대학교 대학원에서 이사장님께 명예박사 수여식을 한다는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대학원 총학생회장이던 전 이사장님께 학생 대표로 축하를 드리는 기쁨을 맛봤구요...

일반 명예박사 행사라면 관심도 없었을텐데, 이사장님이시라 마음 설레이게 몇일을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도 이 글을 보니 그때에 생각이 나네요..

건강하십시요~^^



Yeong Seok Park님이 회원님의 게시물을 공유했습니다.

4월 28일 

나는 이해찬 일세대다. 그렇게 부르더라. 180점 만점 연합고사에 체력장 20점이, 밀림같던 여느 중학생들처럼 일상과 상상을 좀먹었었다. 그때 즐거운 기억이라고야 학교에서 활동 보다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 학교를 마치고 겪었던 바니, 그저 몸이 좀 커진 초딩이었나 보다.

고등학교는 달랐다. 사학재단이 설립한 학교를 이사장은 국가에 헌납했다고 했다. 짧은 역사에도 선배들의 진학결과는 무척 좋았다. 공부는 빡세게 시켜도 두발 단속 기준이 느슨했고, 경상남도 내에서 유일하게 사복을 입었다. 동아리 갯수는 진주시에서 제일 많았다.

그런 학교에서 이해찬 교육정책이 막 시행된 1학년, 그 쎄함이 여전하다. 해가 채 지지 않았는데 정규 수업은 끝이 났다. 비교과 영역이 다수를 이루는 특기적성 교육이 몇 교시 있었고, 해가 지도록 운동장은 조용했다.

나는 멋진 친구들과 함께 도서관 관리의 임무를 맡았고, 시간이 날때마다 도서관 현관의 야트막한 공간에서 춤을 배웠다. 비보잉보다 야부리잉에 가까운 시간들이었다. 나는 동아리를 결성했다. 이럴꺼면 공식적으로 춤추고 노래하자며, 제법 까불었다.

2학년이 되자, 문과 이과가 나뉘었다. 우리 학교는 본디 매우 엄격한 학사관리가 유명했기에 이제 달라지나 싶었다. 나는 학년 대표가 되었고 설문조사와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위시한 기획안으로, 시내에서 가장 멀고 재미없기로 유명한 교내 축제의 기획권을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얻어냈다. 비슷한 시기 여느 고교 축제보다 많은 인파와 호응을 바탕으로 재미있게 치뤄냈다.

이제는 모교 축제의 전통이 된 패션쇼를 축제 본행사의 클라이막스에 배치했다. 나는 힙합 부문 모델의 첫 주자였고, 나의 과장된 몸짓은 이후 친구들에게 농담거리가 되곤 했다. 1학년 때 공연보다 세련된 랩으로 무대에도 서고 싶었지만, 아섰다. 대신 음악실을 빌려 말도 안되는 춤과 노래들로 땀이 흠뻑 젖는 공연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냥 그때는 그랬다. 고등학교 3학년에 등극하기 전까지, 참 잘 놀았다. 그때는 공부가 담배가 여자가 허세가 멋있다기 보다, 열일곱 열여덟의 오후를 뭐 하고 보내는 지가 축제나 모의고사 같은데서 윤곽을 드러낼 때 그때 그 친구들은 멋있었다.

많은 비판들이 있었지만, 그 때 그 교육과정을 겪은 이로서 누린 시간과 경험이 내 삶을 풍부하게 만들기에, 빠듯한 규율과 일정의 열일곱 열여덟들에게 나는 좀 미안하다. 할배들의 고민 끝에 '젊은이들의 시간을 좀먹기'로 결정했음을 할배들만 모르니까.

다시 돌아와, 이 엄혹한 학사관리의 역사를 가진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연신 진짜 사복이냐며 되물었고, 걱정을 일삼으셨다. 멋진 선생님을 만나 그 시절은 빛났고, 그 시절을 누릴 시간이 내게는 있었다. 그 시간을 누리게 만든 것이 이사장님이 말씀하신 돌고 도는 선의의 굴레가 빚어온 작은 결실 중 하나라면, 나는 오늘도 그 멋진 선생님의 말씀을 빌어 후배를 위해 술을 산다. 그 좋은 시간 내게 갚지 말고 또 후배에 갚으라며.

※계속 추가될 예정입니다. 김장하 선생에 대한 여러분의 기억이나 추억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댓글로 올려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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