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교토 어느 절간, 풍신수차와 그 무리의 무덤

김훤주 2016. 1. 30.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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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2일 일본 탐방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첫날 오사카를 둘러보고 이튿날과 셋째날은 교토에 머물렀습니다. 오전에는 이름난 관광지를 찾아다녔고요, 점심을 먹고나서 오후에는 느긋하게 목표를 정해놓지 않고 교토 골목골목을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다녔습니다. 


간사이공항에서 저녁 6시 전후에 뜨는 비행기가 예약돼 있었고 그에 맞추려면 고작 두어 시간만 여유가 있을 따름이었으니까요. 


골목은 참 좋았습니다. 큰길에서 바라보이는 그럴 듯한 모습 대신 그 뒤에 숨은 속살을 제대로 볼 수 있었으니까요. 작지도 크지도 않은 개울도 흐르고 있었고요, 낱낱이 적지 않아 지금 기억은 못하지만, 교토가 근대 시기를 거치며 만들어냈던 이런저런 건물이나 자취도 더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입을 헤벌리고 노니는데, 좀은 오래 된 듯한 어떤 건물 들머리에서 ‘豊臣秀次’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저는 그때껏 풍신수길(豊臣秀吉)만 알고 있었기에 “풍신수차가 누구지? 차(次)라는 글자가 둘째라는 뜻이니 그러면 풍신수길 동생쯤 되는 모양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오사카성 도요토미(豊臣)신사 앞에 있는 풍신수길공(公) 동상 얼굴 부분.


교토는 한국 사람도 많이 찾기 때문인지 한글로도 적혀 있었습니다. 무슨 절간이었는데요, 풍신수차의 무덤을 모셔놓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아니, 제 기억에 기대어 좀더 자세하게 적자면, ‘풍신수차와 그 무리의 무덤’이었습니다. 


아시는대로 일본에서는 무덤이 사람 사는 마을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집이 좁은 서민들은 동네 공동묘지 같은 데다 가족들 무덤을 쓰는 것 같았고,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는 자기 집안에 따로 무덤을 쓰거나 이처럼 절간 같은 데에도 무덤을 모시는 것 같았습니다. 절간에 무슨 무덤이 있다 해도 이상한 노릇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열린 문 사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까 풍신수차가 원래는 풍신수길의 조카였는데 나중에 양아들로 들어갔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풍신수길이 아들을 보지 못하던 상황에서 대를 잇기 위해 풍신수차를 양아들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풍신수길의 뒤를 이어 대권을 한 손에 틀어쥘 수도 있었던 풍신수차가 여기 묻혀 있다는 얘기였는데요, 이어지는 내용이 상상 초월이었습니다. 출생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아들이 풍신수길한테 생기면서 풍신수차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이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풍신수길은 자기 뒤를 확실하게 이어나갈 아들이 태어나자 갖은 이유를 붙여 풍신수차를 박해하고 결국은 모반으로 몰아 할복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줄거리였습니다. 


오사카성에 있는 도요토미(豊臣)신사. 두 아이와 그 부모가 신전 앞에 앉아 있습니다.


풍신수길이 모반으로 몰자 그 양아들 풍신수차는 발명을 하려고 면담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어딘가에 유폐돼 있다가 할복 명령을 받고 결국 그렇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그 무리들도 거의 다 죽임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아내들과 자식들은 물론이고 시종들까지 무슨 강가에서 대략 마흔에 가까운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도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강가 모래밭에서 어느 누구는 칼로 자기 배를 가르고 목이 날아갔으며 어느 누구는 목이 졸려 죽었으며 또다른 누군가는 독극물을 강제로 먹고는 숨이 끊어졌으며 이런 광경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 나절 남짓 이어지는 처참함이었습니다.


섬뜩했습니다. 아무리 권력이나 핏줄에 대한 욕망 애정이 넘친다 해도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 편 앞에 보이는 무덤은 사실 그 자체이니 저는 곧바로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권력 또는 핏줄에 대한 욕망이나 애정이 지나치면 이럴 수도 있구나……. 사람이 권력을 독차지하면 이렇게 모질어질 수도 있구나……. 


풍신수차는 풍신수길한테 누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자기 권력을 이어갈 양아들이었는데, 그래서 나름 신임도 받고 훈육도 받고 했을 텐데도, 어느 한 순간 친아들이 태어나고 보니 그야말로 개밥에 도토리 신세도 아니고 버림을 받고 목숨까지 빼앗기고 말았구나……. 


게다가 풍신수길은 자기 양아들의 아내들과 자식들로도 모자라 그 시종들 목숨까지 없애고 말았구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친아들 미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마흔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여버린 악행은 참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풍신수차(도요토미 히데츠구). 한국어 위키백과에서 가져왔습니다.


크지 않은 절간은 고즈넉했습니다. 오른쪽으로 풍신수차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무덤이 놓여 있었습니다.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가 소리 없이 돌아나왔습니다.(이 무덤과 절간은 제가 충격을 나름 크게 받은 때문인지 사진 찍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습니다.)


나오면서 다시 안내판을 보니까 무슨 강가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의 시신은 오랫동안 내팽개쳐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 뒤 누구도 돌보지 않아 그 백골은 그냥 나뒹굴거나 모래에 파묻혔고 사건 자체도 잊혀졌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풍신수길과 그 뒤를 이은 풍신수길 친아들의 권력이 무서워서였을까요? 그래서 다들 쉬쉬 하며 숨겼기 때문에 잊혀지기까지 했겠지요. 


어쨌거나 참사가 벌어진지 십 몇 년이 지난 시점에 무슨 행사인지 공사인지를 그 강가에서 하는 바람에 백골들이 숱하게 드러나게 됐고 이를 통해 과거 참사를 알게 된 어떤 인물이 여기 절간을 짓고 그 유해를 모셔 기릴 수 있도록 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저랑은 아무 상관이 없기는 하지만, 죽고 나서 십 몇 년이 흐른 뒤에라도 이렇게 유골을 수습해 모신 인물이 대수롭게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참 고마운 일이다’ 하는 혼잣말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던 것입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한 번 찾아봤습니다. 양아들 풍신수차와 그 무리를 이토록 잔인하게 없애버린 풍신수길, 그리고 그 친아들은 어떻게 됐는지를요. 


친아들 풍신수뢰(秀頼)는 1593년 태어났습니다. 풍신수길 나이 쉰일곱이 되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듬해입니다.(1589년에 첫 아들 풍신학송(鶴松)이 태어났으나 이태 뒤인 1591년 죽고 맙니다. 그러자 풍신수길은 곧장 풍신수차를 양아들로 맞아들였습니다.) 


양아들 풍신수차와 그 무리를 죽인 해는 1595년입니다. 풍신수뢰가 세 살 되던 해에 싹쓸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1598년에는 아시는대로 풍신수길이 숨을 거뒀습니다. 임진왜란 7년 난리도 더불어 끝났습니다. 


풍신수길이 죽은 뒤 아버지 자리를 이어받은 친아들 풍신수뢰는 어떻게 됐을까요? 이러저러한 곡절 끝에 1615년 덕천가강(德川家康) 군대에 깨지면서 친어머니와 함께 자살했습니다. 


아울러 아들은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살해됐으며 그보다 한 살 더 어린 딸은 비구니가 되는 조건으로 목숨을 부지하다 서른여섯으로 1645년 세상을 떴습니다. 이로써 풍신수길은 핏줄마저도 끊기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허망하고 또 허망합니다. 강가 모래밭을 피로 물들이며 그토록 오로지했던 권력인데도 그야말로 찰나입니다. 그리고 그 찰나가 지나고 나니 허방다리이고 그조차 아래에 아무것도 없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제 뜻대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조금만 길게 보면 누구나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풍신수길은 풍신수차를 죽였지만 그로부터 고작 3년밖에 버티지 못한 채 황천길을 뒤따라가야 했습니다. 


그 아들 풍신수뢰는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최고 권력 자리에 올랐지만 권신들 등쌀에 내내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다 권신 덕천가강 가문에 맞서 전쟁을 일으켰으나 곧바로 깨지고는 아버지를 뒤따라 저승에 가고 말았습니다. 


풍신수길은 “아아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는구나. 오사카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라는 절명시를 남겼답니다. 그런데 이런 행적을 뒤적여보니 풍신수길이 잔뜩 의미를 집어넣은 이 절명시가 오히려 가증스럽게 여겨집니다.  


※ 풍신수차 무리가 참변을 겪은 역사 현장이, 나중 돌아와서 찾아보니 가모가와(かもがわ:鴨川) 강가의 모래밭 산조가와라(さんじょうがわら:三条河原)로 돼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교토 갈 일이 있으면, 꼭 한 번 찾아가 둘러보고 싶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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