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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 선생이 받은 김용근 민족교육상은?

기록하는 사람 2015. 5. 22.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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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81) 효암학원 이사장이 김용근 민족교육상을 받았습니다. 지난 5월 16일 오전 11시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추모관에서 시상식이 있었는데요. 저도 다녀왔습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노무현 정부 인사보좌관-인사수석이었던 정찬용 씨가 이 상의 주체인 '석은 김용근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더군요. 정찬용 수석은 노무현 정부 첫 인사보좌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제가 담양군 자택에 찾아가 첫 인터뷰를 했던 분이었습니다. 그 후 정말 오랫만에 만나뵈었습니다.


한겨레 신문 부사장을 하셨던 언론인 임재경 선생도 여기서 다시 뵈었고요. 전교조 위원장을 하셨던 정해숙 선생,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용화 상임대표도 만났습니다. 또 5.18광주항쟁 당시 가두방송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차명숙 씨도 여기서 만났습니다. 은우근 교수님도 오랫만에 뵈었고요. 은 교수는 이날 시상식 사회를 맡았습니다.


오른쪽에 정찬용 회장과 임재경 선생 등이 앉아 있습니다. @김주완


기념사업회가 채현국 선생을 21회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는 아래에 나와 있습니다.


김용근 민족교육상

제21호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채현국 선생은 엄혹한 독재하에서 민주인사들을 남몰래 지원하는 활동을 했을 뿐 아니라 효암학원을 설립하여 학생들이 흥미와 적성을 찾아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뭐든 하고싶게 만드는 선생님의 역할을 강조하는 교육철학으로 운영하여 우리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채현국 선생의 실천적 삶은 스승이신 석은 김용근 선생의 교육철학뿐 아니라 5.18민중항쟁 때 제자들을 피신시키다 감옥에 갇힌 김용근 선생의 실천적 삶에 맞닿아 있습니다.


기념사업회는 석은 김용근 선생의 정신을 살아가려는 제자들의 마음을 담아 이 상을 드립니다.


2015년 5월 16일

석은 김용근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정찬용



시상식이 시작되기 전 객석에서 정해숙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채현국 이사장. @김주완


그러면 석은 김용근 선생은 어떤 분일까요? 그날 행사장에서 낭독된 김용근 선생의 연보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석은(石隱) 김용근(金容根) 선생 연보


*1917년 10월 28일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현산리 죽현에서 부친 광산 김씨 문정공파 16대손 준수 님과 모친 윤소신 님 사이에서 1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선생의 유년시절 가족이 목포로 이사를 하여 영흥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양동교회 박현세 목사님의 추천을 얻어 1932년 평양숭실학교에 종교 유학하다.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와 동기 동창)

*숭실학교 기독청년회 종교부장으로 활약하던 중 신사참배 거부와 관련되어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다.


김용근 선생 묘소. 광주 5.18민주묘지에 있습니다. @김주완


*숭실학교 졸업 후 1937년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소재 개량학당에서 야학을 지도하던 중 일제에 의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목포지방법원에서 6월의 실형을 선고받다.

*출옥 후 1939년 2월 2일 강진군 도암면 학장교회에서 조주일 여사와 결혼, 목포시 대성동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면서 목포 유달국민학교에서 첫 교직에 몸담다.


*1940년 연희전문학교 사학과에 입학, 같은 해 장남 창중을 얻다.

*1942년 장남 창중의 돌 직후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전주지방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다.

*1945년 1월 전주교도소에서 출옥하여 강진군 작천면 본가에서 요양하던 중 일제에 의해 징용영장을 발부받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도피하던 중 만주 신경에서 8.15해방을 맞다.


석은 김용근 선생. @김주완


*1945년 10월 강진 본가에 귀향,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다.

*1946년 연대 사학과에 입학 후, 재학 중 관현악단의 클라리넷, 호른 주자와 농구선수로 활약하다.

*1950년 연대 졸업 후 경복고 교사 취업과 대학원 진학이 이루어졌으나 한국전에 터져 귀향하다.

*1951년 초 경찰에 쫓기던 군·면 인민위원들을 자택에서 보호했다는 혐의로 강진경찰서에 연행돼, 장흥에서 약식재판을 받은 후 석방되다.

*1951년 육군 제20사단에 입대하다.(당시 사단장은 연희전문학교 동기동창으로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박병원 씨)


*1954년~196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로 국사과목을 강의하면서 농구부 육성. 시인 신석정 님과 같은 집에 살면서 두터운 교분과 사상적 교류를 갖다.

*1965~1972년 3월 광주고, 광주일고에 재직, 세계사를 강의하는 한편 농구부를 육성하다. 이때 광주일고 학생독서회 '향토반'의 지도교사를 맡다.

*1972년 교단을 잠시 떠나 서울에서 사업(분필공장)에 힘썼으나 대홍수로 인하여 실패하다.

*1973~1976년 전남고에 봉직, 유신체제하 긴급조치 상황에서 학생시위에 책임지고 사임하다.


김용근 선생 묘소에 참배하는 채현국 이사장. @김주완


*1977년 회갑을 맡아 제자들의 주선으로 광주YMCA 백제실에서 기념 강의.

*1978년 귀향하여 농사를 짓는 한편 향토문화연구, 작천노인대학 창설, 지역교회 및 민방위 강연활동 등을 계속하다.


*1980년 6월 광주민중항쟁 관련으로 옥고를 치르다. 당시 선생은 지명수배 중인 제자 윤한봉, 정용화 등을 자택에 보호하여 범인 은닉죄를 적용받아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 6개월을 선고받다.

*1983년 10월 3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작천교회 장로로 임직하다.


*1985년 5월 22일 새벽 5시 30분 숙환으로 소천하다. 향년 69세.

*1987년 9월 18일 독립유공자로 추서되다.

*2002년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추서되다.


시상식에 참석하신 분들. 왼쪽 휠체어 타고 계신 분이 김용근 선생 부인입니다. @김주완


석은 김용근 선생은 이런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흠모하는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그 제자들이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기념사업회 연보도 옮겨 적었습니다.


석은 김용근 선생 기념사업회 연보


김용근 선생의 제자들은 선생께서 타계(1985년 5월 22일)하신 뒤 매년 묘소 참배(강진군 작전면 현산리)를 진행해오다


*1990년 5월 석은 김용근 선생의 타계 5주년에 선생을 기념하는 문집 발간을 결의함(위원장 황지우 시인)

*1991년 5월 석은 김용근 선생 문집 발간 후 봉정함.


*1995년 5월 김용근 민족교육상 제정.

의의 : 선생의 민족 자주독립과 민족통일, 민주화를 위한 교육, 계몽활동을 기리는 기념사업의 지속

재정 : 제자들의 성금과 유족의 지원

집행 : 교육, 노동, 농민 등 각 분야를 망라한 단체 또는 활동가(시상금 300만 원)

 -1995년 이후 20회 시상

기념사업회장 : 1대 이양현, 2대 윤한봉, 3대 김희택, 4대 현 정찬용


상을 받으러 단상에 오른 채현국 선생이 참석자들에게 인사하고 있습니다. @김주완


상패 전달 @김주완


꽃다발 전달 @김주완

채현국 선생이 수상자 인사말을 하고 있습니다. @김주완


이렇게 하여 제정된 민족교육상은 올해까지 모두 21회 수상자를 내었습니다. 그동안 수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역대 수상자


1995년 1회 윤영규 전교조 위원장

1996년 2회 풀무학교

1997년 3회 양동지 선생(교사)

1998년 4회 김연순 선생(교사)

1999년 5회 극단 토박이

2000년 6회 LA민족학교

2001년 7회 김현준 선생

2002년 8회 베를린 세종학교

2003년 9회 실상사 작은 학교

2004년 10회 한빛고등학교 교사회

2005년 11회 장석웅 전교조 위원장

2006년 12회 부천실업고등학교

2007년 13회 윤한탁 선생(교사)

2008년 14회 김명준(영화감독)

2009년 15회 양노린 수녀(성 요셉여고)

2010년 16회 이승요 교장(늦봄학교)

2011년 17회 허선행 교장(타쉬켄트 세종학교)

2012년 18회 김광수 상임이사(은행골 청소년공부방)

2013년 19회 김희용 목사(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2014년 20회 이계삼 국장(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사무국장)

2014년 21회 채현국 이사장(양산 효암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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