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사람이야기

5.18광주 가두방송 주인공 차명숙 만나봤더니

기록하는 사람 2015. 5. 2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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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6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 추모관에서 석은 김용근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정찬용)가 주최한 '김용근 민족교육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채현국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이 수상자였는데요. 이 자리에서 유난히 밝고 활달해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을 보았습니다.


시상식을 마무리할 때쯤 채현국 선생이 참석자들을 소개했는데요, 그때 이 아주머니가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때 시민들을 상대로 가두방송을 했던 여성들 중 한 명인 차명숙(1960년생)이란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차명숙 씨는 항쟁 이후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른 후, 광주에선 살 수 없어 서울로 갔다가 카톨릭센터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지금은 남편의 고향인 안동에서 홍어 전문식당 '행복한 집'을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2007년 시민사회신문이 정리한 차명숙 씨의 약력은 아래와 같습니다.


채현국(가운데)선생과 팔짱을 낀 차명숙 씨. @김주완


차명숙 씨는 = 5·18당시 거리방송을 통해 항쟁의 불씨를 일으킨 주역 중 한 사람인 차명숙씨.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광주항쟁 당시 그녀의 나이 열아홉, 광주에 있던 이종사촌 오빠의 사진관 일을 도우며 양재학원에 다녔던 평범한 여성이었다. 성당을 다니면서 어렴풋이 군부의 그늘아래 있는 사회상을 깨달았다고 한다.


5월 19일 차씨는 자신이 다니던 국제양제학원에 갔으나 문이 잠겨 있어 시내로 나갔다가 시위에 가담하게 된다. 19일 도청 앞 공수부대원들과 시위대가 대치하는 상황에서 전옥주(58) 씨와 몇몇 남학생들과 시민군들에게 물을 떠다 주었다.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이 시작되면서 광주시민들에게 이런 상황을 알려야 겠다고 마음 먹고, 그들은 마이크를 잡았다. “계림전파사를 가서 ‘아저씨 앰프 좀 빌려달라’고, 방송을 안 하면 지금 광주 시민이 다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지금 빌려주시면 내일 이 시간쯤에 갖다 드리겠다고.” (「5·18 항쟁 증언자료집」전남대 5.18연구소, ‘차명숙의 이야기’에서)


차씨는 22일 거리방송을 하다가 도청 앞에서 시민들에게 간첩으로 몰려 체포됐다.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조사를 받았다. ‘간첩 20만명을 동원해 2백명을 사살하게 한 장본인’으로 몰려 9월 19일 계엄포고령 위반과 내란음모 등의 죄목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10월 27일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2년여의 옥고를 치른 뒤 81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시민사회신문 기사 원문 보기


차명숙 씨가 석은 김용근 선생의 부인(휠체어에 앉은 분)과 아들을 배웅하고 있다. @김주완


차명숙이 주남마을을 찾아가는 까닭


차명숙 씨는 이날 시상식이 끝난 후 채현국 선생을 모시고 1980년 군인들의 무차별 총기 난사로 17명의 무고한 주민이 학살된 주남마을을 찾아가기로 했다더군요.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주남마을에는 왜 가시나요?


"주남에서 군인들이 열다섯 명을 죽이고, 부상자 세 명 중 두 명을 또 사살하고, 한 명은 살았는데, 이후로 군은 군대로, 경찰은 경찰대로 거길 봉쇄하고 감시대상이 되었죠.(복받치는 듯 갑자기 목이 메이며 '아이고' 하며 울먹였다.) 군인들이 총을 난사하면서 방에 있던 사람도 총을 맞았더라고. 그래서 저는 그 마을을 생각하면 굉장히 마음이 아파요. 한 10년 넘게 감시대상이 된 거죠.


그건 안 겪어 본 사람은 몰라요. 그 분들이 지금 70이 넘었고, 80, 90이 다 됐죠. 그때 고등학교 1학년 아이가 지금 오십 세 살이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방안에서 총을 맞았어요. 그런데 별로 광주에서 관심이 없죠. 작년에 저희가 대구 인혁당 피해자들과 가봤어요. 인혁당 사형수 송상진 선생 아들 송철환 씨와 갔는데, 오십 세 살 먹은 여성분이 혼자 그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올해도 저희가 가보기로 약속을 했어요."


주남마을 학살사건이란 뭘까요?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위키백과에서 찾아봤습니다.


+[위키백과]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또는 주남마을 학살 사건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 외곽에서 광주 시외로 나가던 버스에 탑승한 시민 17명이 공수부대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의 전남도청 집단 발포 후, 전남도청에 배치된 7공수부대, 11공수부대는 21일 16:00에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여 지원동 주남마을,녹동마을에 주둔하며 지나가는 차량의 차량 통행을 봉쇄하였다.


주남마을은 광주에서 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이다.


5월 23일 오전 주남마을을 지키던 11공수부대 62대대 4지역대 병사들이 지나가던 버스에 발포를 하여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 15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였다. (11공수 보안 부대는 15명을 사살했다고 보고) 이 버스는 광주와 화순을 오가던 버스이다. 이 사건의 피해자 중에는 손옥례, 고영자, 김춘례, 박현숙 등 10대 여성 4명도 포함되었는데, 당시 손옥례의 시신에서는 대검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좌유방자창이, 박현숙의 시신에서도 자창이 발견되었다. 


23일 오후 11공수부대 62대대 5지역대 소속 병사 몇 명이 부상자 3명 중 남자 2명을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가 총살하였다. 국방부 과거사위의 관련자 면담에 따르면, 본부의 모 소령이 부상자를 데려온 것을 책망하자 11공수여단 62대대 5지역대 ○지대 모 중사 등 3명이 부상자를 처리했다. 인근 야산 중턱으로 리어카를 몰고 간 병사는 누군가가 안락사를 시키자고 한 후 사살했고, 묻고 났을 때는 해가 질 무렵이었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지원동에서는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 이외에도 적십자 활동을 하고 있던 차량에 대한 발포한 사건, 트럭 운전사를 살해한 후 너릿재 터널에 트럭을 밀어 넣고 소각한 사건도 있었다.


그 외에도 담양으로 나가는 광주교도소, 장성으로 나가는 광주 톨게이트, 나주로 나가는 송정리 공군 부대의 시외곽을 봉쇄하였고, 시민들의 출입을 완전히 통제하였으며, 여기서 평소 시외를 드나들던 시민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시상식 참석자들과 식사 후 기념촬영. @김주완


다시 그에게 물었습니다.


-채현국 선생과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영주에서 1년에 서너 번씩 좋은 분들이 모이는 모임이 있는데, 거기에서 채현국 선생님이 계속 저를 데려오라고 하셨나봐요. 그렇게 알게 됐죠. 좋으시죠. 저 연세에 젊은 아이들을 배려한다든가, 저런 게 쉽지 않죠."


-80년 그날 이후 35년이 지났지만, 주남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차 선생님도 그 트라우마가 만만치 않을텐데요.


"그래서 겉으론 이렇게 항상 웃어요. 거기에 빨려들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죠. 그런데 그 속에 들어가면 참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안 들어가려 하죠.


우리는 개인적으로 감시를 당했지만, 주남마을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 마을 모두가 고립되고 감시를 당했는데….


보수적인 곳으로 소문난 안동에서도 이명박 시절에 (5.18추모제를) 시작했어요. 젊은 아이들이 잘 해요. 걔네들이 누구냐면요. 당시 5월에 전국에서 열두 명의 열사들이 민주화를 부르짖다가 죽었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안동대에서 분신을 했죠. 그 때 스무 명이 안동대에서 잡혀들어갔는데, 경찰에서 스스로 분신이 아닌 걸로 조작하려 했는데, 이 스무 명이 너무 순진한 거야. 결국 민주화를 위한 순수한 분신으로 판명이 났죠.


그 때 그 친구들이 안동 상주 영주에서 이걸(5.18추모제) 하고 있는 거에요. 너무 잘해요. 작년이었나? 버스 세 대가 (광주에) 왔어요. 그렇게 안동이 안 하던 일을 하게 되었어요."


-예전에 가두방송을 했던 여성분들이 몇 분 더 계시잖아요. 그 분들과는 교류를 하시나요?


"작년에 만났어요. 34년만에. 기념재단에서."


-왜 그동안에는 연락이 안 됐나요?


"되는 사람은 되고, 안 되는 사람은 안 되고. 서로 연락처는 알고 있는데 서로 만나기가 싫죠. 왜냐면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으니까."


김용근 민족교육상 시상식장에 앉아 있는 차명숙 씨. @김주완


-80년 당시에 양재학원을 다니셨다고요?


"예. 지금은 안동에서 '행복한 집'이라고 홍어 팔고 있습니다."


-다니셨던 양재학원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계시네요.


"에이. 인생은 항상 꼬이게 되어 있고, 가는대로 가면 돼요."


이처럼 자신도 그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면서 자신보다 더 힘든 분들을 챙기는 차명숙 씨였습니다.


저는 아쉽게도 주남마을 가는 길에 동행하지 못했습니다. 자유언론실천재단(이사장 김종철) 광주순례단과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못 갔지만 저도 언제 한 번 꼭 주남마을에 가보려 합니다. 그리고 안동 갈 일 있으면 '행복한 집'도 꼭 찾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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