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강기갑 수염 도포를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김훤주 2012. 12. 31. 07:00
반응형

저는 강기갑 전 국회의원을 다시 보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권영길 무소속 경남도지사 후보 선거운동과 관련해 강기갑 선수가 모습을 보였습니다. 투표 독려 기자회견에, 우리한테 익숙한 그 수염에 한복 차림으로 나타났습니다.

저는 진보고 보수고 뭐고에 앞서서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번 대선 결과를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내실이 그리 단단하지도 않은 박근혜 새누리당 선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한 번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굳게 박혀 있습니다. 이게 대선 결과에 나름 영향을 끼쳤음은 누구도 아니라 하지 못할 것입니다.

1. 수염과 도포를 두고 한 강기갑의 약속

그런데 강기갑 선수는 약속을 저버렸습니다. 어쩌면 지킬 생각조차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진보 몰락의 또다른 원인을 짐작해 봅니다.

그이는 지난 총선에서  앞으로는 수염도 기르지 않고 도포도 벗겠노라며 '지지'를 '호소'하고 한 표라도 붙잡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선거 끝나고 나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염을 다시 기르고 도포를 입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저도 지키지 못하는 약속을 많이 했고 그 때문에 여러 사람 힘들게 한 적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그 영향이 미쳤을 뿐이지만, 강기갑 선수는 이를테면 국민적인 인물이(었)고 또 진보정치진영의 상징이 되기까지 했기 때문에 같은 수준ㅇ서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계 은퇴를 하고 정치 쪽으로 걸음을 아예 하지 않는다 해도, 약속은 약속으로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이에 대한 제 생각의 한 자락을 풀어놓아 보려고 합니다. 별 것은 아니고요, 2012년 9월 14일 금요일 김상헌 기자가 진행하는 MBC경남의 라디오광장에 출연해 제가 김상헌 기자랑 주고받았던 몇 마디 말들이 되겠습니다.

-------------------------------------------------------------------------------------

경남도민일보 사진. 장영달 민주통합당 경남도당 위원장이 뒷줄에 멀찌감치 서 있네요.


김훤주 : 이번에 경남이 낳은 대표적인 진보정치인인 강기갑 통합진보당 대표가 지난 10일 대표직을 그만두고 당적까지 버렸는데요, 이를 계기 삼아 정치인의 약속에 대해 한 번 얘기해 보고 그 무게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김상헌 : 그렇군요. 강기갑 대표는 우리 경남의 사천 출신으로 정치에 나서기 전에는 농민운동가로 이름을 널리 알렸지요.

2.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대표선수 강기갑

김훤주 : 예, 다음 포털에서 강기갑이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나오는데요, 여기 보면 농민운동 경력이 가장 먼저 뜹니다. “1971년 사천농고를 졸업하고, 76년 가톨릭농민회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농민운동을 시작하였다. 1982년 사천 출신 가톨릭 신부의 영향으로 수도자의 길에 들어섰다가 1987년 고향으로 돌아와 한국가톨릭농민회 경남연합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조직적인 농민운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1989년 전국농촌총각결혼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120여 쌍을 결혼시켰고, 대책위원회 간사인 박영옥을 만나 결혼하였다.” 이런 식으로요.

김상헌 : 강기갑 대표는 농민운동을 할 때 거침없이 발언한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2001년 10월 31일에는 창원을 찾아 경남도청에서 벌인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도민 초청 오찬 간담회에서 경호원들에게 끌려나온 적도 있었습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경남도연맹 의장이어서 농민 대표로 초청받은 자리에서 강기갑 대표가 점심을 먹고 나서 “농사꾼으로서 대통령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며 일어섰다가 끌려나갔지요. 강 대표는 당시 “정권재창출에 집착하는 대신 소신 있게 정책을 펴나가고 대북 쌀 지원 조기 실시 등 농민들의 뜻을 직언하려 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뉴시스 사진.


3. 정치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강기갑

김훤주 : 맞습니다. 그러던 강 대표가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으로 있던 2004년에 전농이 정치세력화 결정을 하자 그 방침에 따라 지금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에 들어갔고, 들어가자마자 치러진 총선에서 농민 대표로 민주노동당 여섯 번째 비례대표 후보로 지명돼 당선됐습니다.

김상헌 : 그런 과정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활동해 민주노동당과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부각이 됐고, 2008년 치러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에서는 자기 고향인 사천 선거구에서 현역 의원이자 한나라당 사무총장이던 이방호 후보를 누르고 당선돼 다시 한 번 전국적으로 눈길을 끌었지요.

김훤주 : 그 때 이명박 대통령에 맞서던 지금 새누리당의 박근혜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이들이 강 대표를 위해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는데, 어쨌든 강 대표의 사천 지역구 선거 결과는 경남에서 가장 큰 이변으로 여겨졌었지요.

이런 성과에 힘입어 같은 해 5월 민주노동당 원내대표를 맡았고, 7월에는 당대표가 되기까지 했는데, 그 때도 지금 진보신당 계열로 있는 사람들이 탈당해 통합진보당이 어려운 조건에 있었는데, 1년만에 강 대표는 정당 지지율을 10%대로 끌어올리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답니다.

김상헌 : 강 대표는 ‘강달프’라는 애칭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지요? 강달프는 하얀 도포를 입고 수염을 기르는 모습이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마법사 ‘간달프’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것인데요, 대체로 그이를 아끼고 좋아하는 이들이 많이 썼던 별명이지요.

김훤주 : 그렇다고 저도 알고 있습니다. 강 대표의 애칭 강달프는 그이가 대중적으로 성공한 정치인임을 보여주는 물증이기도 한데요, 이런 별명을 얻게 한 강 대표의 독특한 모습은 다음 포털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돼 있어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농민 출신인 강기갑은 항상 긴 수염에 두루마기를 입고 고무신을 신는 독특한 용모로 눈길을 끌었다.” 물론 여기서 고무신을 늘 신었다는 표현은 사실과 다릅니다. 같은 흰색이기는 하지만 고무신이 아닌 가죽신을 신을 때도 많았거든요.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는 고무신으로 버티기가 어려우니까요.

4. 총선 직전 특별기자회견에서 나온 강기갑의 약속

김상헌 : 지금 들어보니까, 강기갑 대표가 지난 19대 총선에서 수염을 깎고 한복을 벗은 것과 관련해서 얘기가 이어질 것 같은데, 그런가요?

김훤주 : 예, 맞습니다. 4월 11일 투표일을 겨우 6일 앞둔 5일에 강 대표는 사천시청을 찾아 일반 기자회견이 아닌 특별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김상헌 : 그 자리에서 강 대표는 턱수염과 콧수염을 말끔하게 밀어버린 모습과 하얀 도포 대신 점퍼를 입은 모습을 보여줬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관심을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김훤주 : 그러면서 강기갑 후보 선거대책본부 관계자는 “유권자를 향한 결의의 표현으로 십 수 년을 함께한 수염을 깎았다.”면서, “강 후보가 수염을 깎은 것은 사천·남해·하동 시민 군민과 서민·농어민·노동자·중소상공인을 위해 그 어떤 것도 버릴 수 있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강조하기까지 했어요.

김상헌 : 강 대표는 수염에 얽힌 사연도 있지요. 1989년 전국농촌총각결혼대책위원장을 하던 시절 농촌 총각들이 결혼을 할 때까지 수염을 깎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말입니다.

김훤주 : 강 대표의 수염 사랑은 각별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이는 사람 몸에서 자연스럽게 나는 털은 다 까닭이 있다,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의 털도 그렇지만 턱수염이나 콧수염은 보온을 해 주는 효과와 더불어 코에 들어가는 먼지를 걸러주는 기능도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자연스럽게 나는 털을 일부러 깎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지요.

김상헌 : 그런 수염을 깎았으니, 게다가 도포까지 벗어던졌으니 그 때 언론들이 크게 관심을 보인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겠어요?

5. 수염 도포 같은 지엽말단으로 민심을 얻겠다고?

김훤주 : 맞습니다. 게다가 강 대표는 그날 기자회견 자리에서 도포와 수염은 구태의연하다는 뉘앙스를 풍기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말했거든요. “수염도 깎고 두루마기도 벗어 버리고 깨끗한 모습으로 새로운 정치를 해달라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에 보답하겠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강하고 투지 넘치는 이미지에서 탈피해 예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살아가겠다”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여기서 그쳤으면 제가 더 말씀을 드릴 게 없겠는데, 강 대표는 '앞으로' '절대' 수염을 기르지 않겠고, 한복도 굳이 고집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해버렸습니다. 거기에다 수염을 깎으라는 유권자들 주문이 많다고 하면서, “이명박 정권 심판하고 새로운 정치를 위해서는 더 큰 각오를 다지지 않으면 안 되며, 이런 각오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수염을 깎고 한복을 벗었다.”고 덧붙였지요.

김상헌 : 그런데 지금 수염을 여전히 기르잖아요? 한복 두루마기도 마찬가지로 입고요.

김훤주 :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이제 와서 결과를 놓고 보자면, 눈앞에 닥친 선거에서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진보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인 강기갑 대표가, 지키지도 않을 거짓말을 그야말로 식은 죽 먹듯이 입에 침조차 바르지 않고 해댔다는 것입니다. 때가 많이 묻은 새누리당이나 통합민주당 소속도 아닌데 말입니다.

김상헌 :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강 대표의 수염 깎는 문제는 사소한 것 아닌가요? 지나치게요.

김훤주 : 그렇지요. 사소한 것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더 우습고 무서워요. 특별 기자회견 자체가 수염을 깎으면 지역 유권자들 표심이 자기에게로 올 것이라고 여겼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게다가 실제로 유권자들 마음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잖아요? 이른바 진보개혁민주진영이 여기저기서 삐걱거리고 무능한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새누리당이 별로 잘하는 것이 없는 국면인데도 표를 얻지 못했잖아요? 이게 우스운 것이지요.

김상헌 : 근본에 대해서는 손도 대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겨우 어찌해 볼 수 있는 세력임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김훤주 :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요. 게다가 유권자들을 그런 눈가림으로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6. 그나마 약속을 지키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저는요, 지난 10일 강 대표가 사퇴 기자회견을 할 때 눈물을 흘리고 큰절을 했다는데, 그 눈물과 큰절의 진정성을 믿기가 어려워요. 어차피 이벤트나 쑈가 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서요. 4월 5일 수염 깎은 특별기자회견을 할 때도 강 대표가 눈물을 흘리고 큰절을 했거든요.

뉴시스 사진.


김상헌 : 그나저나 이런 일이 왜 벌어진다고 생각하세요?

김훤주 : 유권자들이 기억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요. 유권자들이 잘 기억을 해 놨다가 투표를 할 때 ‘아 강기갑이라는 후보가, 강기갑이 소속돼 있는 통합진보당이라는 정당이 이런 거짓말을 했지’, 하면서 투표를 하지 않는다면 정치인들의 헛된 소리가 사라지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통합진보당뿐만 아니라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 그리고 얼마 안가 새로 창당할 또다른 진보정당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김상헌 : 안철수 현상이 등장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지요. 정치는 정당을 배제하면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런데도 어떤 정당에도 소속돼 있지 않은 안철수라는 사람이 차기 대통령 지지율이 매우 높은데, 이는 진보든 보수든 아니면 수구적이든 모든 기성 정당들이 유권자들에게 더할 데 없는 실망을 되풀이해서 안겨준 탓이라는 얘기지요.


(무서운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진보진영도 거짓말을 밥먹듯이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구나, 진보진영조차도 처음부터 사람을 속이려 들고 거짓말을 하는구나, 이렇게 여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번에 강기갑 선수는, 수염을 깎지 않고 도포를 벗지 않을 바에는, 권영길 선수 투표 독려 기자회견에 나오지 않았으면 진짜 좋았겠다는 생각을 저는 그래서 한 번 더 하게 됐습니다.)

김훤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