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언론

리영희 선생을 생각하며 장지연을 떠올리다

기록하는 사람 2010. 12. 5.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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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눈을 뜬 후 가장 먼저 접한 기사는 '리영희 선생 타계'였습니다. 회사에 출근하니 후배기자가 대뜸 이렇게 묻더군요.

"국장님 세대에게 리영희 선생은 어떤 분인가요?"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에겐 사상의 은사였지. 그분의 남북 군사력 비교 논문을 통해 남북관계를 알게 됐고, 중국과 베트남의 진실은 물론 한국에 살고 있는 이북 5도민들이 왜 극우반공주의자일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됐으며, 이리역 폭발사고와 핵무기를 비교한 글을 통해 반전반핵 사상을 갖게 해주신 분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저렇게 돌아가실 때까지 끝까지 소신을 지키며 일관된 삶을 살아오신 분이 드물다는 점에서 시대의 표상이라 할 수 있지. 당장 우리 지역만 해도 젊을 때 데모깨나 했다는 사람들 중에서 나이 들고 난 뒤 자리욕심에 추한 꼴 보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나. 한 때 언론인의 사표처럼 여겼던 장지연만 해도 말년엔 친일로 변절해버렸지."

지난 5월 4일 서울 백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리영희 선생이 지인들의 방문을 받고 활짝 웃고 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그렇게 대답하고 난 뒤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 속에 저장된 파일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7~8년 전 경기도 파주에서 리영희 선생을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찾아보니 2003년 3월 27일, 언론노조 중앙위원회 자리였더군요. 그 때 저는 언론노조 경남도민일보 지부장과 부울경언노협 의장을 맡고 있었는데, 중앙위원회에 앞서 리영희 선생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거기까지 오셔서 약 두 시간동안 이라크전 파병과 관련된 국제정세에 대한 강연을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당시의 사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기록관리를 제대로 못한 탓입니다. 그 때 블로그가 있었더라면 이렇게 사진기록물이 완전히 멸실되는 건 막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습니다.

다만 당시 리영희 선생의 강의를 들은 후 제가 신문에 남긴 짤막한 칼럼에 그 때의 상황이 짧게 남아 있더군요. 2003년 당시에도 리영희 선생은 투병 중이셨고, 주위의 부축을 받으며 강연장에 들어와 의자에 앉은 채로 강의를 시작하셨는데, 강의가 막바지에 이르자 지팡이에 의지한 채 벌떡 일어나 팔을 휘두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때의 모습을 추억하며 당시 제가 썼던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장지연 선생과 리영희 선생 

2003.04.12  09:13:00  김주완(위클리경남부장)

지난 7일은 제47주년 신문의 날이었습니다. 1896년 한국 최초의 근대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한 날을 맞아 57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제정한 기념일입니다. 그 날은 처음으로 신문윤리강령이 선포된 날이기도 합니다.

말년에 친일로 변절한 장지연.

<경남도민일보>는 매년 이날을 맞아 기자회 주최로 마산 현동에 있는 위암 장지연 선생 묘소를 참배하고 참언론인으로서 자세를 되새겨 왔습니다. 알다시피 장지연 선생은 1905년 일본의 을사조약 체결을 개탄하는 '시일야 방성대곡'을 <황성신문>에 발표한 언론인의 사표로 여겨져 온 분입니다.


그러나 그의 친일행적이 드러났습니다. 1913년 <경남일보> 주필을 그만두고 마산으로 이사온 그는 15년부터 18년까지 일본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문>에 꾸준히 친일기사와 논설을 써온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이 내용은 <위클리경남> 3월 1일자에 자세히 보도된 바 있습니다.


한 두 번 용기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평생을 일관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희소가치 때문에 끝까지 소신을 지킨 위인들이 후세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기자회 운영위원회는 올 신문의 날에 장지연 묘소 참배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기자회는 그 이유로 "친일 행적이 밝혀진 이상 관행에 따라 장지연 무덤을 참배하는 것은 이율배반이고 자가당착"이라는 점을 들었지만, 사실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적어도 경남도민일보 기자들만큼은 장지연 선생의 소신과 용기를 넘어서는 참언론인이 되겠다는 선언이며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나부터, 평생 죽을 때까지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지금의 소신을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모골이 송연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난 10월 17일 전오마이뉴스 편집국장 등 후배들의 방문을 받은 리영희 선생 내외분. @정운현


얼마 전 서울에서 반전·평화를 위한 이라크전 파병반대 강연에 나선 리영희 선생을 만났습니다. 부축을 받지 않으면 거동하기도 힘든 몸으로 언론계 후배들이 모여있는 강당에 나타난 선생은 예의 그 번득이는 눈빛으로 정연한 논리를 설파해 나갔습니다. 강의가 막바지에 이르자 지팡이에 의지한 채 벌떡 일어나 팔을 휘두르는 선생의 모습에서 저는 온몸에 전율이 흐름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제가 보는 리영희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 될 지도 모를 그날 강의는, 인생의 막바지에 친일로 변절한 장지연 선생의 묘소와 오버랩되면서 많은 감정을 느끼게 했습니다. 지역에 존경받을 언론인 선배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장지연 선생을 대체할만한 분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리영희 선생님, 편히 가십시오. 선생님이 걸어오셨던 그 길은 저희 후배들이 따라 걷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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