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별 의미없는 것

지가 본 것을 비밀로 해드리겠다는 변기

김훤주 2009. 12. 4.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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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에 가면 이런저런 딱지들이 종종 붙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뭐 '문화인은 공공시설을 깨끗하게 씁니다', 이런 따위가 붙어 있었고요, 최근 들어서는 이를테면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뿐만이 아닙니다', 이런 것도 붙어 있지요.

제가 유심히 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이런 더 최근에는 이런 것도 있었지 싶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운운. --변소 잘 쓰고 나서 더럽힌 채로 두지 말라는 얘기겠지요.

그런데, 며칠 전 마산 한 아구찜 가게에서 아주 기발한 녀석을 만났습니다. 평소 봐 왔던 화장실 어쩌구 하는 것들에는 별로 취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만, 이 녀석은 단번에 눈길을 확 사로잡았습니다.

"당신이 저를 소중히 다루시면
 제가 본 것은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쉿!        -변기 올림-"


어떻게 보면 무시무시한 협박입니다. 저처럼 상상력이 거치른 사람은, 바탕 구성된 문장이 '조건절'이라서 마음에 안 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면 하고 말면 말지, 무슨 조건을 달아?" 이런 것이지요. 하하.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런 문구를 두고 재미있어 하나 봅니다. 무슨 논리를 들이밀어 얘기하자면, 무생물(변기)을 의인화해서 그로 하여금 발언하게 한 발상(發想)의 뒤집음이 산뜻하고 재미있다, 뭐 이런 정도겠지요.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날 그 아구찜 가게에는 어떤 예쁜 아줌마랑 같이 갔습니다. 같이 간 아줌마가 술 밥을 먹다 말고 밖에 나갔다 오더니 그랬습니다. 얼굴에 웃음기를 한 가득 물고서 말입니다.

"화장실에 재미있는 글이 붙어 있어요. 변기에요. '당신이 소중히 다뤄 주시면 저도 본 것을 비밀로 해 드리겠습니다'라나." 했습니다. 그러더니 제가 블로그를 하고 있는 줄 아는 사람이다 보니 "하나 찍어 올려요. 여자 화장실에 있지만 눈치보지 말고 그냥 들어가면 돼요." 이랬습니다.

얘기를 듣고 저도 웃었습니다. 당연히, 재미있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이 아줌마가 고정된 틀에 사로잡혀 있지 않으니까 이렇게 자연스럽게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자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서 본 것을 이렇게 다 털어놓고 얘기하는 경우를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이번 같은 글귀는, '제가 본 것'에 눈길과 생각이 머무르면 좀 민망스러워할 여지가 충분히 있는 표현이거든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제 맞은편에 앉은 아줌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기가 본 글귀 얘기를 했습니다. 앞에 앉은 저를 아예 남자로 여기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하하. 어쨌거나, 독촉도 있고, 한편으로는 저도 오줌이 마려웠던 참이라, 곧바로 일어나 변소로 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여자 칸이 어떤지 보기도 전에 남자 쓰는 칸에도 같은 글귀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변소에서 이런 새로운 표현을 봐서 즐거웠습니다. 함께 간 아줌마가 무슨 내숭을 떨거나 낯가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유쾌함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집 아구찜도 맛이 좋았습니다. 밥도 보통 식당과는 달리 아주 차져서 좋았습니다.

술은 무엇을 마셨느냐고요? 소주 한 병 맥주 두 병을 주문해 마셨는데, 저는 맥주만 조금 마셨고, 맞은편 예쁜 아줌마는 소주도 마시고 맥주도 마셨습니다. 저는 요즘 어찌 된 일인지 술이 별로 내키지 않아서요.

그렇지만 변소서 본 글귀 하나만으로도 무척 즐거울 수 있었답니다. 덕분에, 앞으로 무슨 식당 등등에 가면, 거기 변소에 무슨 글귀가 붙어 있나 눈여겨보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기는 합니다만. 하하.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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