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5·16직후 유족회·교원노조 탄압은 위법

기록하는 사람 2009. 10. 21.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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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박정희 소장 등 5·16쿠데타 세력이 전국의 민간인 피학살자유족회와 교원노조, 사회당 등 정당·사회단체 간부 수천 명을 검거해 처벌한 것은 명백한 위법이라는 국가기구의 결정이 나왔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 안병욱)는 21일 "5·16쿠데타 주도세력은 쿠데타의 성공여부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4·19 이후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벌인 진보적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고 이들을 불순세력 또는 용공세력으로 몰아 부당하게 탄압하고 처형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미 법원의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민족일보 고 조용수 사장 외에도 피학살자유족회와 교원노조 간부 등 피해자들의 재심 신청과 손해배상 소송 등이 줄을 이을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정권 혁명검찰부의 전국피학살유족회 간부들에 대한 공소장.

당시 5·16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 소장은 다음날인 1961년 5월 17일 육군 방첩부대장에게 경찰이 입수하고 있던 '리스트'에 근거하여 용공분자들을 색출하라고 지시했으며, 5월 18일부터 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을 동원하여 민족일보사와 전국양민피학살자유족회, 교원노조, 사회당 등의 주요 간부와 정치인 등 수천 명을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검거해두는 일)했다.


이어 6월 6일 쿠데타세력은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하여 스스로 "헌법 또는 법률로써 규정할 사항은 국가재건최고회의령으로 정한다"라고 함으로써 입법, 행정, 사업에 관한 국가권력 전권을 장악하여 헌정질서를 파괴했다. 또한 '업무의 신속한 처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의장인 박정희 소장이 단독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렇게 설치된 최고회의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를 통해 예비검속된 인사들을 장기간 불법구금한 상태에서 가혹행위를 가하여 수사했으며, 중앙정보부는 이들을 처벌할 법률도 없는 상태에서 '범법자분류심사위원회'를 설치, A(주동), B(행동), C(희박) 등급으로 분류한 후 A급을 혁명재판에 회부했다.

또 그들은 4·19직후 교원노동조합에 가입한 교사 3000여 명을 적법한 절차 없이 강제로 면직시켜 교직에서 추방했을 뿐 아니라, 한국전쟁기 군경에 학살된 사람들의 유골과 합동묘, 위령비를 강제로 훼손시키는 이른바 '부관참시'까지 저질렀다.

1960년 거창 신원면 학살희생자 유족들이 조성한 합동묘. 그러나 5.16쿠데타정권은 묘를 파헤치고 비석을 산산조각내버렸다.


쿠데타세력은 특히 잡아가둔 사람들을 처벌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한 달 뒤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을 만들어 3년 6개월 전의 행위까지 소급하여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함으로써 당시 구헌법의 '소급효금지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했다.


이렇게 제정된 위헌적인 법률로 인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사회당 최백근 조직부장이 사형선고를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경북피학살자유족회장을 지낸 신석균 씨의 경우 "4·19 이후 남파되어 유족회장으로 가장하여 밀약한 간첩'으로 왜곡·조작되어 복역 중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했다.

또 전국피학살자유족회 노현섭 회장은 무기징역(마산), 이원식(대구) 사정위원장은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는 등 수십 명의 유족회 간부들이 혁명재판에 회부돼 유죄선고를 받고 복역했다.

이밖에도 쿠데타세력은 교원노조 간부들과 경북사회당 간부들이 반공임시특별법(안)과 데모규제법(안) 제정에 반대하고 남북학생회담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반국가행위로 몰아 10년, 15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에 대해 당시 혁명재판소의 한 심판관은 "특별법이 소급법임을 알았지만, 심판관으로서 어쩔 수 없었다"고 진술했으며, 또 다른 심판관은 특별법의 소급규정에 항의하다가 혁명재판소 내 구치감에 수감되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따라 진실화해위는 △공식 사과 △법원의 재심 △특수범죄처벌법에 대한 위헌 여부 판단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을 정부와 법원·헌법재판소, 입법부에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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