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혼인빙자간음죄를 이모저모 뜯어보니…

김훤주 2009. 9. 15. 17:05
반응형

지금 헌법재판소에서는 형법 제304조가 헌법을 위반하고 있는지 여부를 두고 공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형법 제304조는 혼인빙자간음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304호 다음 괄호 안에 '혼인빙자 등에 의한 간음'이라 적혀 있군요.

먼저 법률 전문을 보실까요?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로써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여기서 범죄 주체는 남자가 되고 범행 대상은 그냥 '부녀'가 아니라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입니다.

누가 법률 아니라 할까봐 그러는지, 낱말부터가 어렵군요. 사전을 한 번 뒤져보겠습니다. 빙자(憑藉)는 핑계를 내세움이고, 위계(僞計)는 거짓 계책이며, 상습(常習) 늘 하는 버릇인데, 부녀(婦女)는 결혼한 여자와 성숙한 여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군요. 그리고 기망(欺罔)은 남을 속여 넘김,이랍니다.

1. 음행의 상습이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음행(淫行)을 빠뜨릴 뻔했습니다. '음란한 행실'이라 돼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음란(淫亂)을 찾으니 '음탕하고 난잡함'이라 적혀 있고 그래서 다시 음탕을 찾으니 이번에는 '음란하고 방탕함'이라 해서 '음란'이 도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국어사전처럼 도돌이표를 붙여가며 대충 뭉뚱거리면 음행이란 음란하고 음탕하고 난잡하고 방탕하고 문란한 그 무엇이 되겠습니다.

음행의 상습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곧이곧대로 옮겨 보니, 음란한 행실을 늘 하는 버릇이네요. 좀 속되고 가볍게 날리는 말로 하자면, '헤픈'쯤이 될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를, 아끼지 않고 함부로 쓴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니까 이 법률 조항이 보호하려는 것은 '헤프지 않은 여성'일 것입니다.

법정 모습. 경남도민일보 사진.


이를 두고 정부 부처 사이에도 논란이 붙었습니다. 여성부는 8월 6일 제출한 의견서에서 "폐지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한 달 전 헌법재판소가 의견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거든요. 반면 법무부는 지난 10일 벌어진 공개 변론에서 "존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성부가 폐지를 주장하는 까닭은 이렇습니다. "여성을 의사결정 주체가 아닌 성적으로 종속된 존재로 보고 있으며, 여성을 비하하고 '정조' '순결'을 우선시하는 관념에 기초한 조항이다." 여기서 비로소 음란의 뜻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정조를 함부로 쓰고, 순결을 아끼지 않는다는 얘기입지요.

정조(貞操)는 정절(貞節)과 같은 말인데 '여자'의 곧은 절개라는군요. 절개(節介)는 또 무엇일까요. (동어반복이 되풀이됩니다만) 지조와 정조를 깨끗하게 지키는 '여자'의 품성이랍니다. 이성 관계에서 순결을 지키는 일이라고도 합니다. 순결(純潔)은 무엇인지 궁금해지 않으신가요? 여성들에게 더 많이 적용된다는 사실은 다들 아시지요. '이성과의 육체 관계가 없음'이라 나와 있네요.

2. 여성부와 달리 존치를 주장하는 법무부

사실이 이렇다 보니 검찰 마초들이 판을 치는 법무부도 '다소 가부장적'이라는 사실은 인정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혼인빙자간음죄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며 엄연히 피해자가 있는 현실에서 도덕적 영역에 관여한다고 해도 곧바로 위헌이라 할 수는 없다."

위헌이라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도 여성 비하와 여성 보호의 착종(錯綜)은 있습니다. 혼인빙자간음죄 자체가 표현은 여성비하적이면서도 내용은 어느 정도 여성 보호를 담고 있습니다.(표현 문제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사회 통념을 떠받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초스러운 법무부가 여성 보호를 내세워 여성비하적 법률 표현을 존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입니다.

이런 착종은 사건 발단에서도 짐작이 됩니다. 이번 사건은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사이라고 부모에게 소개하겠다'고, 같은 직장 여성에게 거짓말한 뒤 네 차례 성관계를 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던 남자가 지난해 이 조항으로 행복추구권과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됐다면서 제기한 헌법소원입니다. 이른바 '혼빙'의 여성 보호 측면 탓에 손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남성이 낸 헌법소원인 것입니다.

3. '혼빙죄'의 양면성에서 비롯된 착종

물론 점잖게 전체 맥락을 보면 폐지든 존치든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라는 규정은 문제가 있다고 보는 점은 같은 듯합니다. 다만 여성부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피해자를 보호하는 대안은 따로 마련하되 '시대착오적'이고 '가부장적'인 이런 조항은 없애야 한다고 보는 것이 법무부랑 다른 것 같습니다.

현행 '혼빙'이 인식의 고정, 고정관념의 고정을 변하지 않게 하는 구실을 톡톡히 하는 만큼, 이를 폐지함으로써 '남녀 사이 책임과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여러 사람의 많은 생각 변화를 불러오자는 얘기 같습니다. 그리고, 규율이 필요하다면 형법이나 민법 등등 다른 식으로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지 공감대를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점도 있습니다. 남성은 적용 대상이 아닙니다. 남성은 '음행의 상습'이 없어도 보호 받지 못합니다. 지금은 남성 피해자가 충분히 생길 수 있는데도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비춰보면 '혼빙'이 여성을 반편으로 여기는 통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관계를 할지 말지 결정도 제대로 못하는 이등인간이라는 인식입니다. 이번 헌법 재판 과정에서 이런 점이라도 널리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