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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18

얼굴이 뭉개진 그 해 5월의 사진 한 장

그 날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이 한 장 앞에 놓여 있었다는 것 하나만 빼고는 모든 것이 기억에서 깨끗하게 지워져 있다. 심지어 그 사진이 흑백이었는지 칼라였는지도 사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진 속 그림은 개의 머리 같아 보였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까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눈, 코, 귀, 입, 뺨, 눈썹 그 어느 것도 제 자리에 붙어 있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당연히 헝클어져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져 있었던 것이다. 1983년 5월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그 때 나이 스무 살, 대학 2학년이었다. 태어나서 20년이 이르도록 그런 사진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있었다. 이처럼 참혹하지는 않았지만 6.25전쟁 때 북한군에게 죽은 남..

영화 군함도를 보니 전두환 정권이 떠올랐다

한국 사회 폭력성의 뿌리 어린 시절에 대한 나의 기억은 폭력과 동행하고 있다. 개인적인 폭력이 물론 많지만 집단적인 폭력도 있었다. 10대였던 70년대는 물론 20대였던 80년대도 한국 사회는 폭력이 지배했다. 개인이 감당해야 했던 폭력도 많았고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짊어져야 했던 폭력도 공존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감당해야 하는 폭력은 특정 집단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경우였다.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당하는 폭력은 당연히 개인의 몫이었다. 군부독재정권에 대항했기 때문에 당하는 폭력도 어쩌면 개인의 몫이었다. 대항을 포기하면 폭력도 멈추기 때문이다.한국 사회 구성원이면 무조건 당해야 하는 폭력이 있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자기 나라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 그냥 태어난다. 그 결과로 당해야 하는 ..

이제 왕국을 허물고 민국을 세울 때가 되었다

삼강행실도의 무시무시한 그림들 거제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에 가면 무시무시한 그림들이 있다. 조선시대 삼강(三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열녀도들이다. 에서 가져왔다. 삼강은 알다시피 임금에 대한 신하의 도리, 남편에 대한 아내의 도리, 어버이에 대한 자식의 도리 셋을 이른다. 주인은 임금과 남편과 어버이다. 종속된 것은 신하와 아내와 자식이다. 는 광해군 시절 만들어졌다. 앞서 세종 때는 , 중종 때는 가 만들어졌었다. 광해군 시절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다. 임진왜란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래서 충신·효자·열녀가 많이 배출되었다. 열녀·충신·효자가 많은 시절은 살기 팍팍한 시절이었다. 살아남기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절이었다. 그림을 보면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지 저절로 알게 된다...

홍준표는 왜 전두환 조상 초상을 안 뗄까?

전두환과 그 족속이 결국 추징금을 내놓기로 했습니다. 참 추잡한 집안입니다. 대를 이어 내려가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전두환은 깨끗하게 씻어내면 낼수록 좋은 그런 존재임이 뚜렷하게 확인되고 있습니다. 경남에는 전두환 잔재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경남도청 4층 대회의실에는 전두환 조상 초상이 첫째입니다. '향토 출신 선현'이라는 한자 제호 아래 여섯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5명과 함께 왼쪽에서 두번째 자리에 걸려 있는 '영수 전제 장군'이 그것입니다. 전제라는 인물은 전두환의 14대 조상입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던 시절 봉안됐습니다. 당시 경남도지사는 이규효였습니다. 1. 권율에게 목이 베인 인물이 경남의 선현(先賢)? 초상 아래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창녕 박진·의령..

경남에서 전두환은 과연 무엇일까?

전두환이 추징금과 비자금 탓에 여러 사람들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저는 전두환에게 받을 빚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때문에 이런 글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공공의 눈을 어찌 개인 문제로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 하하. 전두환이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과 비난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전두환은 적어도 우리 경남 지역에서는 아직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과거입니다. 무엇을 청산해야 하는지, 어떻게 청산해야 하는지, 누가 앞장서 청산해야 하는지 따위를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라도 되면 좋겠습니다. 8월 12일 저녁, MBC경남 ‘라디오 광장’의 ‘세상읽기’에서 나눈 얘기들입니다. 끄트머리에서 “권율 장군에게 효수(梟首)당했다고 에 기록이 나오는 사람입니다”까지만 전파를 탔고 나머지는 시간이 모자라 말하지 못한..

전두환 일당의 역사 왜곡과 의병장 전제

1. 다시 눈길을 끌고 있는 전두환 요즘 전두환이 다시 사람들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전두환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원흉입니다. 1987년까지 정권을 쥐고 군사독재를 하면서 숱한 영혼과 육체를 괴롭힌 잘못이 있습니다.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지금 전두환이 사람들 눈길을 끄는 까닭은 돈과 관련돼 있습니다. 전두환은 나라에 내야 할 돈(추징금)은 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내야 할 돈을 부정불법하게 빼돌렸다는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전두환 아들이 국제 조세 회피 지역에서 페이퍼 컴퍼니를 만든 사실까지 확인됐습니다. 전두환은 이처럼 골고루 죄인입니다. 전두환이 끼친 폐해는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정치 경제 역사 문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습니다. 그런 폐해 가운데..

이은상과 김춘수, 그리고 반야월

1. 문인의 사람됨, 대중가수의 사람됨 2012년 9월 20일로 기억되는데요, MBC경남의 라디오광장에서 같은 방송국의 김상헌 기자랑 둘이서 얘기를 나눴습니다. 친일 이력이라는 말로는 크게 모자랄 정도로 전쟁 참가 선동으로 부역을 한 반야월이 소재였습니다. 지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이은상과 그 시비가 떠오르고, 둘을 한 번 비교·대조해 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어서 이렇게 끄집어내 봤습니다. 대중가수와 문인, 반성·사과한 사람과 반성·사과는커녕 인정조차 안한 사람,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어떻게 보면 문인이라는 인간이, 학자라는 인간이 대중가요 가수보다 훨씬 못합니다. 반야월 이야기를 하던 당시 ‘꽃’의 시인 김춘수를 설핏 비교해 봤는데요. 그이는 본인의 친독재 행적을 인정하고 반성했지만 그 뒤에 ..

민주주의전당, 마산에는 개 발에 닭 알

1. 마산은 민주주의와 반독재의 고장인가 민주주의전당이 있습니다. 2001년 6월 28일 국회를 통과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에 건립한다고 돼 있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7년 대선 과정에서 광주에 짓겠다고 공약했고요, 박근혜 현 대통령은 2012년 11월 28일 마산에 짓겠다고 공약했습니다. 마산에서는(행정통합이 됐으니까 이제는 창원이라 해야 맞겠네요.) 그동안 민간 차원 시민 사회에서 민주주의전당을 마산으로 끌어오자는 논의와 운동을 벌여왔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은 어쩌면 그 성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이제는 민주주의전당을 마산에 두자는 얘기를 더 이상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산이 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역사적 사건인 3·15의거와 10·18부마민주..

영남서 김대중 비판한 호남 출신 국회의원

천정배 민주당 최고위원이 7월 25일 부산에 왔습니다. 부산 중구 영주동 부산민주공원에서 블로거들과 간담회를 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을 비판했습니다. 알려진대로 천정배 최고위원은 전남 신안군 암태도 출신입니다. 같은 정당 출신이고 또 같은 호남 출신이면서도 김대중 대통령을 비판하다니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이의 김대중 비판은 자기에 대한 반성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인식이 철저하지 못하고 깊지 못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천정배 최고위원은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독점탐욕세력'이라 규정하며 "이제는 비판조차도 아까운 집단"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권력과 재산을 누구랑도 나누지 않고 탐욕스럽게 독차지하려 한다는 얘기입니다. 천정배 최고위원은..

국가폭력으로 인생 망가진 할아버지 이야기

삼청교육 피해 장애에 경찰 사찰까지 국가 폭력으로 말미암아 30년 넘게 장루 장애(2급)를 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줌과 관련된 기능이 망가져 오른쪽 장딴지에 장루(몸 밖으로 소변을 빼내기 위한 주머니)를 차고 다녀야 하는 정정웅(69·창원시 진해구 자은동) 어르신입니다. 1942년 2월 부산에서 태어난 어르신은 1980년 5월 전두환이 군사반역을 일으키기 전에까지는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육군까지 다녀온 뒤 서울에서 김두한(1918~72) 국회의원 수행원을 하다가 김 의원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대전 서대전역 근처에서 식당을 했다고 합니다. 1980년 5월 어느 날 저녁 시장에서 찬거리를 장만해 오는 길에 대전서부경찰서 민모 형사만 만나지 않았으면 계속 그대로 평범하게 살았을 것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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