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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하 9

<줬으면 그만이지>…김장하 바이러스와 나비 한 마리

여기 바이러스가 하나 있다. 아는 이들은 김장하 바이러스라고들 한다. 발원지는 서울에서 1000리 떨어진 한반도 동남쪽 경상남도의 중소도시 진주라는 곳이다. 이 바이러스의 첫 번째 특징은 자기가 가진 바를 한사코 나누고 베푼다는 것이다. 증상이 가장 먼저 발현한 김장하 선생의 삶을 보면 그것은 이렇다. 태어날 때는 그럭저럭 먹고사는 집안이었으나 1950년대 6.25전쟁을 비롯한 시대의 격랑에 가세가 기울면서 친구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남의 한약방에서 점원 노릇을 해야 했다. 힘든 조건에도 틈틈이 주경야독한 실력으로 10대 후반 한약종상 시험에 합격하고 이를 바탕으로 20대부터 한약사로 성공해 대단한 부를 일구었다. 이렇게 힘든 시절을 겪었으면 그 성과를 자기 앞으로 쌓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데도 그는 ..

진주 김장하 선생, 남성문화재단 35억 재산 경상대에 기탁

경상국립대학교(GNU·총장 권순기)는 12월 9일 오후 5시 가좌캠퍼스 GNU컨벤션센터 3층 다목적홀에서 ‘남성문화재단 재산 수증증서 전달식’을 개최한다. 이 행사는 진주지역 대표적인 비영리 공익재단법인 (재)남성문화재단(이사장 김장하)이 해산하고 그 재산을 경상국립대학교 발전기금으로 기탁함에 따라, 김장하 이사장의 숭고한 뜻을 예우하고 대학 구성원의 감사한 마음을 표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행사에는 권순기 경상국립대학교 총장과 대학본부 보직자, 남성문화재단 김장하 이사장, 정병훈 이사(진주문화관광재단 창의도시추진단장), 김중섭 이사(진주문화연구소 이사장), 문은진 사무차장 등 10여 명이 참석한다. 행사는 참석자 소개, 김장하 이사장 약력 소개, 김장하 이사장 동영상 시청, 출연증서 전달, 수증증서 ..

존경하는 어른을 위해 지역잔치를 준비한 진주사람들

1월 에는 진주 김장하 선생에 대한 기사와 사설, 칼럼이 연달아 실렸습니다. 인터넷언론 와 에도 기사가 실렸으나, 그 외 다른 언론에는 전혀 관련 기사나 칼럼이 없었습니다.그럴 수밖에 없었죠. 기사가 나온 3개 매체 외에는 16일 진주 시민들이 마련한 김장하 선생 75세 생신 잔치가 열린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초대받지도 못했죠.그도 그럴 것이 는 진주의 인터넷 시민언론으로, 그 자리에 초청받은 사람들이 운영진으로 있는 언론이죠. 윤성효 기자는 그날 행사의 사회자 역할을 맡았습니다.운 좋게 저도 김장하 선생 이야기를 다룬 책 (2016)을 썼던 인연으로 그 자리에 초대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쓸 수 있었던 기사가 18일 자 1면에 보도된 '김장하 선생님 베푼 삶 따라 걷겠습니다..

진주사람들이 '어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식 #김장하

"저는 고등학교 2학년부터 대학교 4학년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선생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갔더니, 자기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니…." 단상에 불려 나간 문형배(53) 부산고법 부장판사는 목이 메어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청중이 격려 박수를 보냈다. 잠시 뒤돌아서서 눈물을 훔친 그가 말을 이었다.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으라고…(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것이 있다면… (다시 청중 박수) …있다면, 그 말씀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 강동옥(57) 경남문화예술회관 관장이 나왔다. "선생님은 진주오광대 복원과 진주탈춤한마당, 진주민예총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셨고, 극단 ..

진주 김장하 선생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

※계속 추가될 예정입니다. 김장하 선생에 대한 여러분의 기억이나 추억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댓글로 올려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이인안 어릴 때 저희 동네에서 한약방을 했어요 당시 사천군 용현면 선진리 흔히들 '석거리'라고 불렀던 곳. 언제부터 거기서 한약방을 했는지는 모르겠고.. 진주로 한약방을 옮긴건 제가 초등 4~5학년? 암튼 어릴 때부터 워낙 훌륭한 분이라는 얘길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어 우리는 거의 세뇌수준^^김장하 선생님이 장학사업을 하기 전이니 그 전 한약방을 운영하면서부터 그 인품과 실력이 모든 분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릴 적 넓은 마당이 있던 석거리 남성당 한약방은 우리들의 놀이터였습니다 마당이 넓고(물론 초등학생의 눈높이) 항상 먹을 것이 많아 틈만 나면 친구들과 그 집에서 ..

별난 사람 별난 인생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들

머리말 직업 특성상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적극 활용하는 편이다. SNS가 주는 피로감 가운데 끊임없이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욕하는 글을 봐야 한다는 것도 있다. 물론 내가 공감하는 비판이 더 많지만, 그런 글을 계속하여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하루 종일 짜증과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나, 알아두면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올리려 노력하는 편이다. 답도 없는 비판이나 분노를 표출하는 건 내 글을 보는 친구들에게도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라 여겨서다. 일선 기자 시절 나도 은폐되어온 역사의 범죄를 발굴하여 까발려왔고, 토호세력이나 권력자에 대한 비판을 일삼아 해왔지만, 아무리 그래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 답답함을 ..

7화. “돈은 모아두면 똥이 된다” 김장하 선생의 지론

내가 자동차를 가지지 않은 이유 나는 차가 없다. 운전면허증도 없다. 앞으로도 차를 가질 계획이 없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계기는 진주에서 남성당한약방을 하고 있는 김장하 선생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다. 1991년이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노릇을 시작한지 1년이 좀 넘은 시기였다. 그분이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있던 진주 명신고등학교를 무상으로 국가에 헌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수십억 원의 사재를 들여 고등학교를 설립, 명문으로 키운 사람’이고, ‘정부의 전교조 교사 해직 압력에 굴하지 않고 단 한 명의 교사도 자르지 않은 사람’이며. ‘워낙 검소하여 자동차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궁금했다. 한약방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

재산은 세상의 것, 세금은 누구의 것일까

"똥은 쌓아 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핀다." 진주에서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하고 있는 (재)남성문화재단 김장하 이사장의 말입니다. 이분에게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문형배 판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문 판사가 사법고시 합격 후 김장하 이사장을 찾아가 이렇게 인사를 드렸답니다.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제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감사드립니다." 이에 대한 김 이사장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내가 아니었어도 자네는 오늘의 자네가 되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자네를 도운 게 있다면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나는 사회에서 얻은 것을 사회에 돌려주었을 뿐이니 자네는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감사해..

내가 운전면허를 따지 않는 까닭

나는 차(車)가 없다. 운전면허증도 없다. 앞으로도 면허를 따거나 차를 살 생각은 없다. 그동안 '신속성을 생명으로 하는 기자가 왜 차를 사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번 기회에 그 이유를 밝히자면 이렇다. 뭐 환경문제를 생각해서라든지 그런 거창한 건 아니다.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였다. 1990년 마산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사회부 기자로 발령받고 나니 차를 사라는 선배들의 권유가 있었다. 실제 그때 취재기자들은 모두 차를 몰고 다녔다. 당시 내 월급은 50만~60만 원 정도였다. 그 월급으로 어떻게 차를 사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취방 월세만 10만 원, 겨울에 난방 겸 취사용 LP가스 네 통 가격이 10만 원인데…. 게다가 밥도 사먹고 술도 마시고 옷도 사 입고 친구도 만나고, 가끔 부모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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