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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10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수단 할머니를 추모하여...

어제 저녁 서울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이수단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ㅠㅠ" 아, 이수단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다. 1998년 3월 내가 한국정신대연구소 고혜정 부소장, 서은경 연구원과 중국 동북 3성에서 피해자 할머니들을 찾으러 갔을 때 만났던 여덟 분의 피해자 중 한 분이다. 당시 만났던 이옥선, 지돌이 할머니 등은 우리나라로 귀국하여 나눔의 집에 계시지만, 이수단 할머니는 국적을 회복하고도 고령에다 건강상 문제로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 계시던 중 어제 별세하신 것이다. 당시 우리와 인터뷰 중 중국어로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도 함께 울었다. 아마도 내가 가장 많이 울었던 게 이수단 할머니를 인터뷰할 때였던 것 같다. 당시 고혜정 한국정신..

마산 다짐비가 소녀상이 아닌 까닭

인권 자주 평화 다짐비 건립 과정에 대한 생각 -애초 추진위원회 명칭에서 ‘추모조형물’ 대신 ‘추모비’라는 단어를 썼다. 그러다 보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죽은 이를 추모하는 비석이라면 산이나 공원 등 외곽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약간의 혼선이 있었다. -그러나 터 선정 과정에서 있었던 잡음과 마찰은 결과적으로 다짐비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애정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SNS에서 많은 시민과 타 지역민들이 오동동 다짐비를 응원하며 좋아요를 눌렀고 널리 공유해주었다. SNS를 통해 ‘마산 오동동에 일본군 ‘위안부’ 추모 조형물을 세운 까닭’을 올리고 공유한 것도 주효했다. 또한 발빠르게 조형물 앞에 ‘이곳에 세우는 의미’ 안내판을 세운 것도 적절했다. 많은 행인이 안내판을 읽..

평화인증샷 협찬 상품이 또 늘었습니다

#평화인증샷 이벤트에 상품이 또 늘었습니다. 평화인증샷 취지에 공감한 분들의 상품 협찬이 줄을 잇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 경남도민일보가 드리는 10만 원, 5만 원, 3만 원 상품권 외에 다음과 같은 상품이 추가되었습니다. ‪#‎고재영빵집‬ 오너쉐프 고재영 님께서 '가장 많은 인원이 나온 사진'에 직접 만든 빵 한 박스를 협찬하기로 했습니다. #햇빛을 즐기는 농부 양형두 님께서 백향과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은성농원 윤성중 대표님께서 은성 배즙 한 박스(30개들이)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고창 농부의아침 농부의아내 김성자 님께서 올댓베리 아로니아 음료 30포 1박스, 올댓베리 아로니아 원액 1리터 1병을 협찬하기로 했습니다. #명품수제프레시하우스 고옥희 님께서 수제돈까스 3팩 +소스, 등심 5장(한팩당..

경남정대연, 기록없는 역사는 복원하기 어렵다

지난 10일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이지영 전임연구원(정치학박사)이 나를 찾아왔다. 1997년부터 약 5년 간 활동했던 '경남정신대문제대책을 위한 시민연대모임(경남정대연)'을 취재해 기록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성가족부 프로젝트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활동하는(했던) 시민운동의 흐름을 기록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창원 이경희 선생이 나를 꼭 만나보라고 추천했다고 한다. 경남정대연 창립에서부터 해산까지 깊이 관여했던 나를 찾아온 건 나름 번지수를 잘 짚은 것이지만, 기록해두지 않은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만만찮았다. 물음에 나름 성실히 대답하고, 당시 신문기사들도 찾아 복사해주었지만 체계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것이라 못내 아쉬웠다. 그를 보낸 후 집에 가서 당시 경남정대연 관련 기록이 있..

한국 역사에서 꼭 해결해야 할 3가지 문제

1960년 창립했다가 1961년 5.16쿠데타로 강제해산되었고, 2009년 재창립한 지도 벌써 6년이 되었네요. 2009년 바로 이 자리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희생자 마산유족회' 재창립을 논의하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그 후 마산 창원 진해 통합으로 '통합 창원유족회'가 되었고, 오늘은 또 사단법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네요. 창립 당시부터 쭉 같이 해왔었는데, 해마다 참석하는 유족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참 뿌듯합니다. 엊그제 여성가족부의 후원을 받아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운동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한 연구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일제에 부역..

일본 민주당 정권에 거는 할머니들의 희망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한국전쟁 때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 '부채의식'을 느낍니다. 일상에 바쁘다는 핑계로 그 문제 해결에 힘을 보태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죄송함'이라고나 할까요? 그 분들만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아려오면서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제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알게 된 것은 1997년 '훈 할머니'를 만나고 나서부터였습니다. 훈 할머니의 고향과 혈육찾기 취재 때문이었죠. 처음 시작할 땐 그냥 기자로서 '특종 욕심' 때문이었지만, 그걸 계기로 할머니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목을 차고 올라오는 울분과 슬픔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97년 여름, 훈 할머니를 기억하시나요?

요즘 독도 문제로 나라 안팍이 떠들석합니다. 각 정당은 물론이고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 차원의 독도 방문 이벤트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경남 창원시는 모두들 다 방문하는 독도보다는 차라리 대마도에 가겠다고도 합니다. 물론 일본의 파렴치한 주장에 대해 규탄하는 것은 좋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잠잠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합니다. 언론의 '떼거리 저널리즘' '냄비 저널리즘' 때문입니다. 또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땐 적극적이다가도 언론의 관심이 식으면 슬그머니 발을 빼버리는 사람들과 단체도 문제는 있습니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언론과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던 한 할머니의 사진을 소개합니다. 바로 '훈 할머니'로 알려졌던 '이남이' 할머니입니다. 엿을 ..

친일청산 반대하면서 독도문제엔 '오버'하는 사람들

지난 98년 3월 한국정신대연구소 고혜정·서은경 연구원, 경남정대연 박소정 사무국장과 함께 중국 동북3성을 헤맨 적이 있다. 중국 땅에 버려져 있는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야말로 ‘광활한 만주벌판’, 포장도 안된 흙탕길을 보름동안 ‘헤맨’ 결과, 여덟 분의 우리 할머니들을 찾아냈다.2004년 ‘위안부 누드’ 파문 때 나눔의 집에서 탤런트 이승연을 향해 일갈하던 이옥선 할머니와 지돌이 할머니가 그 때 우리와 만남을 계기로 조국 땅에 안착했고, 김순옥·이광자·박서운·이수단·조윤옥·하옥자 할머니 등은 아직도 조국 땅을 밟지 못하거나 끝내 한을 풀지 못한 채 쓸쓸히 숨을 거뒀다. 당시 어렵사리 이들 할머니의 거처를 찾았을 때 정말 허탈했던 일이 있었다. 이미 우리보다 먼저..

숨어있는 친일파에 면죄부 될라

지난 29일 서울 광화문 한국언론재단 19층에서 열린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발표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마침 다른 일로 서울 갈 일이 있기도 했지만, 기자로서 역사적인 자리에 꼭 함께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최측의 발표와 브리핑이 끝나고 기자들의 질문 순서가 왔다. 다른 기자들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재빨리 손을 들었다. "오늘 발표한 4800여 명의 친일인사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은 이제 면죄가 되는 겁니까?" 친일 인명 발표가 반갑지만 않은 이유 사실 그동안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도 우려를 떨칠 수 없었던 게 바로 이 문제였다.제 아무리 편찬위원회의 전문가들이 철저히 조사했다 하더라도 증거자료 확보가 어려워 누락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단지 확인되지 않았을 뿐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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