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박노자 8

박노자 강의를 듣다 보니 조선일보가 생각났다

1. 박노자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2004년이었다. 경남도민일보가 박노자 교수를 모시고 그해 12월 29일 저녁 7시 ‘한국 식민지 유산의 특징과 과거사 청산’을 주제로 특강을 마련했는데 그때 내가 연락과 섭외를 맡았었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박노자 교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서 간절히 청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내 기억으로는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처가가 마산이니까 한국 들어가는 길이 있으면 반드시 연락을 주겠다는 답이 왔고 고맙게도 그게 그대로 지켜졌다. 그 후에도 2007년인가에 한 번 더 박노자 교수를 모시고 특강을 개최한 적이 있는데 그때 기억은 뚜렷하지 않다. 어쨌든 예전 강의에서 나는 정말 얘기를 똑 부러지게 하는구나 하고 느꼈었다. 논증에는 허술함이 없었고 예시는 구체적이었으며 결론에는 비..

우리는 24살 전기공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나는 요즘 촛불집회를 찾아다니며 영상을 찍어 올리고 있다. 100여 개의 영상 중 가장 내 가슴을 후벼 팠던 두 명의 발언을 소개한다."우리나라에서 매년 2000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습니다. 그들이 비정규직이기 때문입니다. 하루 6명의 노동자가 그렇게 죽는다는 사실이 9시 뉴스에 매일 나오면 우리나라가 여태 이랬겠습니까?""학생들은 그러한 비정규직이 되지 않기 위해서 비인간적인 입시경쟁에 내몰립니다. 1년에 250명의 학생이 주로 성적을 비관하여 죽습니다.""1년에 우리나라 국민 1만 5000명이 자살을 합니다. 주로 노인들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키운 자식들이 노동현장에서 고용불안에 내몰리고 힘들어하는 것을 보며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목숨을 끊습니다." 위는 진주 촛불집회에서 박지호..

영상뉴스 2017.01.10

이한우보다 박노자가 좋은 까닭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이참이네요. 저는 오늘 알았는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2009년 7월 이 자리에 앉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납니다. 저는 이 사람을 이한우로 알고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와서 이래저래 하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들은 얘기 가운데는 자기 이름과 관련된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듣고 좀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나는 원래가 독일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자연 문화 역사 등등이 좋아 대한민국으로 귀화했다. 그래서 이름도 한우(韓祐)로 지었다. '한국을(韓) 돕는다(祐)'는 뜻이다." 곰곰 생각해 봅니다. '돕기', '돕는 일'은 자기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남)에게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자기자신을 향할 때는 돕는다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물론 '하늘은 스스로 돕는 ..

씩씩한 남자가 되면 무엇이 좋을까

국민, 민족, 국가 등 근대 이후 갖은 이데올로기 문제를 다뤄온 박노자가 이번에는 남성성을 정면으로 헤집었습니다. 국민 민족 국가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얽어매고 억눌렀듯이 남성성 이데올로기도 같은 노릇을 했다는 결론입니다. 알려진대로 이데올로기란 특정 사실(들)을 바탕으로 지배계급의 이해 관계에 따라 덧칠된 생각이기도 하고, 그런 생각들의 조합이기도 하답니다. 이데올로기는 또 어떤 경우에는 사실 그 자체로 오인되기도 합지요. 박노자의 에 달린 부제는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의 역사를 파헤치다'라고 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첫머리에 '소년 남자'라는 노래가 나옵니다. "무쇠골격 돌근육 소년 남자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만인대적萬仁大敵 연습하여 후일 전공 세우세. 절세영웅 대업이 우리 목적 아닌가". 19..

박노자-허동현 논쟁에서 조갑제가 떠올랐다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는 박노자와 허동현의 논쟁을 담은 세 번째 책입니다. 이들은 이미 2003년 ‘우리 역사 최전선’, 2005년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에서 친미와 반미,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근대와 전근대 등 한국 근대 100년을 아로새긴 여러 풍경을 두고 토론한 바 있습니다. 박노자와 허동현은, 두 사람이 같이 쓴, 들어가는 글에서 ‘역사는 해석일 뿐이다.’고 못박았습니다. 관점이 다른 우파와 좌파가, “기초 사실에 대한 합의는 볼 수 있어도 해석과 서술은 각자 정치·사회적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성향이 달라서 역사도 다른 이 두 학자가 그럼에도 책을 함께 펴낸 까닭은 무엇일까요? “서로가 좌우 성향의 차이를 인정할 경우 미래를 향해 같이 나아가야 할 ..

졸지에 철없는 기자가 돼버렸다

보름 전, 우리나라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신용정보회사의 간부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에게 물었다. "요즘 신문업계가 전반적으로 너무 어렵습니다. 돈 벌만한 아이템 좀 없을까요?" 그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그런 한가한 얘길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돈 벌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살아남을 생각만 하십시오." 10년 전 IMF 구제금융사태에 버금가는 경제위기가 불어닥치고 있는 비상시국에 웬 철없는 소리를 하고 있냐는 것이었다. 한가한 소리 말고 살아남을 궁리만 하세요 지난 주엔 한국언론재단 뉴스저작권사업단 운영위원들과 함께 중국 선전(심천)과 홍콩에 다녀왔다. 공항에서 환전을 하는데 장난이 아니었다. 몇 분 단위로 뛰는 환율 때문에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다. 중국 ..

미국에도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지금은 어떤지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있으리라 짐작하지만, 옛날에는 미국에도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한국학 부교수로 있는 박노자가 쓴 책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제가 앞에서 쓴 글 에서 이어지는 얘기입니다. 191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라는 방직업 소도시가 배경입니다. 한 주에 8달러 하는 월급에다 작업 환경까지 아주 나빴답니다. 10대 후반에 취직하는 노동자 가운데 3분의1이 26살이 되기 전에 저승에서 안락을 찾는 수준이었다니 말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월급 삭감이라는 재앙이 닥쳤고, 그러다 보니 로렌스 노동자 전체가 동맹 파업을 벌이지 않을 수 없는 쪽으로 치달았다고 합니다. 박노자의 이 책을 보면, 당시 경찰은 야만적 구타로 공포 분위기를 ..

고려대는 이미 죽었다?

저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와 대학 동창입니다. 물론, 당선자와 동창이라 해서 전혀 기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거짓말쟁이가 저보다 스무 해 가량 먼저 입학한 동창이고 대통령 당선까지 됐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억수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렇다 해도 저는 제가 82년에 들어간 이 대학교를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고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러시아에서 귀화한 박노자 노르웨이 국립 오슬로대학교 교수가 말한 대로 고려대는 제 마음의 고향입니다. . 고려대에서 보낸 4년이 제 삶을 규정했고 지금도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철학을 배웠고 문학을 공부했으며 역사와 인문을 더듬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포부를 키웠고 한 여자를 만나 사랑했으며 마침내 결혼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운동을 시작해 지금껏 하고 있..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