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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대 3

핵피폭 유전병에 대한 한은정 의원의 관심

1. 한은정 의원의 전화 연락7월 13일 저녁 더불어민주당 한은정 창원시의원한테서 연락이 왔다. 예상하지 못한 전화였다. 내가 경남도민일보 7월 11일자에 데스크칼럼으로 쓴 ‘김형률특별법과 탈핵’을 읽었다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의논하자는 전화였다. 2. 핵피폭2세 김형률의 유전 불치병 김형률은 핵피폭2세다. 어머니 이곡지가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에 노출되었다. 다섯 살 나이였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탈이 없었다. 이곡지가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 김형률이었다. 전체 여섯 남매 가운데 넷째였다. 김형률은 1970년 태어나면서부터 핵피폭 유전병을 앓다가 2005년 5월 숨을 거두었다. 면역력과 호흡기능이 거의 없는 불치병(‘면역글로불린M 증가에 따른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이었..

김형률 특별법과 탈핵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졌다. 현지에 69만 명 남짓 있었다. 7만 명이 조선 사람이었다. 4만 명이 죽고 3만 명은 죽지 않았다. 2만3000명은 돌아오고 7000명은 남았다. 다섯 살 여자아이 이곡지도 이 때 돌아왔다. 아버지와 언니는 나가사키 일터에서 숨졌다. 이곡지는 어머니와 함께 합천 외가에 와서 누구나 가난하던 시절 눈칫밥을 먹으며 자랐다. 이곡지는 겉보기에 문제가 없었다. 1960년대 두 살 많은 합천 남자 김봉대와 결혼하여 부산에서 살면서 4남2녀를 두었다. 위로 세 자녀와 여섯째 막내는 탈이 없었지만 1970년 태어난 넷째·다섯째 쌍둥이는 달랐다. 동생은 1년 반 만에 폐렴으로 죽었고 형 김형률은 선천적으로 병약했다. 결석을 밥 먹듯 한 끝에 초·중..

핵피폭2세 김형률의 삶과 반핵=인권

5월 22일 부산지하철공사노동조합이 불러주는 바람에 부산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저 말고도 몇몇 블로거들을 더 불렀던 모양입니다. 가기에 앞서 이메일로 일정을 받아봤습니다. 노동조합 기자회견 하나, 농성 현장 방문 하나, 그리고 김형률 생가 방문과 추모문화제 참가 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김형률이라……, 부산에서 여러 모로 대단하게 활동을 펼치다가 세상을 떠난 유명 인물이 있는 모양이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부산 가기로 돼 있는 날 아침 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원폭 피해자 2세’ 김형률 아시나요?” 몰랐습니다. 이름은 부산지하철노조가 보낸 메일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이가 핵폭탄 피해자 2세인 줄은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기사를 따라 읽어내려가면서 참 무심하게 살았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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