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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132

"과거는 잊어버려야" 친일파 후손의 뻔뻔한 막말

역사의 진실규명에는 시효가 없습니다8월 19일 SBS 시사 고발 프로그램 는 '도둑골의 붉은 유령-여양리 뼈무덤의 비밀' 편을 통해 경남 창원시 마산 여양리 민간인학살과 친일 문제를 재조명했습니다. 저도 출연하여 이야기를 보탰는데요.거기서 집단학살(Genocide)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그간 여러 번 보도되었던 일이니 새로울 건 없지만, 학살 주범 또는 가해자들이 일제시기 친일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 의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살해되었다는 데 주목한 것은 의미가 깊었습니다.그렇습니다. 저도 여러 차례 글을 통해 이 대목을 짚었는데요. 당장 저희가 발굴 보도해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인정된 이교영 선생과 안용봉 선생도 그런 경우입니다.1919년 마산 진전면 고현시장 장날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

여양리 민간인학살 암매장 동원됐던 박전규 씨

“그 쪽만 쳐다보면 항상 마음에 걸렸어”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옥방마을 뒷산에서 한국전쟁 개전 초기 학살된 민간인들의 유골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데는 꼭 52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것도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태풍 ‘루사’의 도움을 받아서였다. 학살된 유골이 그곳에 암매장돼 있다는 사실은 이미 3년전부터 세상에 알려졌다. 99년 10월26일 의 발굴보도 이후, 2000년 7월16일에는 MBC 을 통해 전국으로 알려졌다. 이에 민간인학살문제 해결을 위한 경남지역모임(대표간사 서봉석 산청군의원)과 피학살자 부경유족회(회장 송철순)에서도 각각 이 지역을 답사한 뒤 발굴조사를 계획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사이를 참기 힘들었던 것일까· 무거운 돌무더미 속에 눌려 52년간 신음하던 유골들은 마침내 태풍의 도움..

[최초보도]여양리 민간인학살, 어떤 사건인가

마산 여양리 뼈무덤의 비밀"비가 억수로 쏟아졌지. 그때가 아마 음력 6월 중순쯤 됐나 몰라. 그러고 나서 한달도 채 못돼 여기서도 전투가 벌어졌으니까."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옥방마을의 박모씨(68)는 이렇게 49년전의 기억을 더듬어 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진주가 인민군에게 함락되지 전이었으니까 적어도 음력 6월 17일(양력 7월 31일) 이전이다. 어쨌든 1950년 7월 하순쯤이었던 건 분명한 것 같다. 오전 8시쯤이었다. 진주시 반성면에서 국도를 따라 10여대의 군용트럭이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발산고개를 넘고 있었다. 트럭 적재함에는 모시한복을 입은 민간인들이 가득 타고 있었고, 그들은 모두 손을 뒤로 한 채 묶여 있었다. 발산고개를 지난 트럭의 행렬은 봉암리를 지나 양촌리 대정마을로 접어들었..

자유총연맹? 이런 단체를 왜 세금으로 지원 육성해야 하나

지난 주말 부산 어린이 전문서점 ‘책과 아이들’에서 열린 출간 기념 북토크쇼에 사회자 자격으로 다녀왔다. 는 김해지역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학살대상자들을 산골짜기로 실어 나르던 GMC 트럭의 눈으로 아픈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는 그림동화책이다. 이 책을 쓴 임경섭 작가와 소설 조갑상 작가, 그리고 내가 민간인학살을 주제로 대담을 나눴는데, 60여 명의 참석자 중 상당수는 우리나라에서 그런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워했다. 실제 우리나라 사람들은 독일 나치의 유태인 학살,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일제의 관동대학살은 알지만 이승만 치하에서 벌어진 민간인학살은 대부분 알지 못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책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현대사에 관심을 갖고 일부러 찾아보지..

진주 가스차 탈취 시위가 6월항쟁 최대고비였던 까닭

LPG가스차 위에서 횃불 들고 "죽자! 죽자!" 해방 이후 세대가 과연 이런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해방의 그날이 오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겠다고 노래한 심훈의 심정을 말이다. 마찬가지로 민주화 이후의 요즘 세대가 87년 LPG 운반차량 위에서 횃불을 들고 "죽자! 죽자!"라고 외치며 진격하던 선배들의 비장했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랬다. 87년 6월 17일 남해고속도로에서 LPG 차량탈취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의 구호는 '죽자'였다. ◇러닝셔츠로 횃불 만들어 = 87년 8월 1일자로 발행된 월간 부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몇 차례의 공방 끝에 고속도로를 점거한 학생들은 오후 7시쯤 경찰가스차 2대와 LPG운반차 2대를 빼앗았다. 학생..

전국 놀라게 한 경상대생 고속도 가스차 탈취 시위

◇태도 달라지기 시작한 경남신문 3만여 명이 참여한 마산 6·10대회를 사회면에 2단 짜리 기사로 보도하면서 '시민 반응 냉담'이라는 제목을 달아 시민의 분노를 샀던 도 15일 시위를 기점으로 보도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16일자 사회면에 가로 제목으로 뽑은 '전국 59개 대 격렬시위-경남·경상·창원대생 시가지 진출'이라는 기사를 통해 전국은 물론 마산과 창원·진주의 시위 소식을 비교적 자세히 전했다. 또 17일자 사회면은 처음으로 시위소식을 7단 사이드 톱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날 보도의 중심은 단연 16일의 진주 시위였다. '경상대생 2천여 명 진주시가지 격렬시위-파출소 등 6곳 기습 불태워-남해고속도 점거 한때 교통마비-시민 2명 최루탄 맞아 부상'이라는 자세한 제목과 함께 고속도로를 점거한 사진..

4·19 이후 진주 최대 시위…항쟁 '재점화'

87년 6월 15일 시위 거점, 마산에서 진주로 6·10대회의 경남지역 거점은 마산이었지만, 진주·거창·진해에서도 소규모 집회가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도 썼던 바 있다. 이들 소규모 집회마저 원천봉쇄하려던 일선 공무원들의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었다. 물론 그 공무원들도 위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독재정권 아래에서 일하는 공무원의 비애였다. 요즘 같으면 경찰 외에 행정직 공무원이나 농협 직원이 시위 저지에 나서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땐 그랬다. 87년 당시 거창군농민회(회장 표만수)가 발행한 (87년 7월 15일자) 창간호를 보면 그들이 거창 6·10대회를 막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공무원 6명이 농민 1명 감시 = 이 신문의 기록에 의하면 앞서..

제주 4.3학살 주범 박진경 대령이 현충일 경남대표라고?

깜짝 놀랐다. 현충일 경상남도 추념식에서 대표인물로 내세운 위패가 박진경 대령이라니. 오늘 현충일을 맞아 경남에서도 추념식과 현충탑 참배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한은정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을 보니 박진경 대령의 위패가 현충탑 중앙에 단독으로 서 있고, '경남도 대표'라고 적혀 있다. 왜 하필 박진경이 경남대표인가? 그는 1948년 제주 4.3사건 진압 사령관이었다. 그의 전임 9연대장 김익렬 대령은 시위대와 평화협정을 해야 한다는 온건파였다. 그러나 후임으로 부임한 박진경은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며 무자비한 소탕작전을 지휘한 학살 주범이다. 그는 또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무..

이건 기록해둬야 해! 문재인 대통령 5.18 기념사 전문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오늘 5·18민주화운동 37주년을 맞아, 5·18묘역에 서니 감회가 매우 깊습니다. 37년 전 그날의 광주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슬프고 아픈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먼저 80년 오월의 광주시민들을 떠올립니다.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이웃이었습니다. 평범한 시민이었고 학생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권과 자유를 억압받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광주 영령들 앞에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오월 광주가 남긴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오늘을 살고 계시는 유가족과 부상자 여러분께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1980년 오월 광주는 지금도 살아있는 현실입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 비극의 역사를 딛고 섰..

불쑥 찾아온 민간인학살 희생자의 손자

오늘 이분이 불쑥 사무실로 찾아오셨다. 창녕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의 손자인데, 1999년 나와 인터뷰도 하고 기사에도 나왔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당시 우리가 만든 '경남 민간인학살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모임' 주최 행사에도 아버지를 모시고 참석했었다고 한다. 그 후 18년이 지난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이었다. 얼굴은 모르겠지만 이름을 보니 기억이 난다. 1950년 한국전쟁 개전 초기 할아버지가 창녕에서 보도연맹원으로 소집되어 트럭에 실린 채 마산으로 끌려가 학살당했다는... 희생자의 3세가 이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는 경우는 그때나 지금이나 드문 일이다. 그동안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노무현 정부 하에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했고, 국가보상금도 받았다고 한다. 오늘 마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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