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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세상 1803

김장하 선생은 『미움받을 용기』를 읽었을까

김주완(『줬으면 그만이지』 저자) 『미움받을 용기』(인플루엔셜, 2014)을 다시 꺼내 읽었다.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가 쓴 이 책은 알프레드 아들러 심리학을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200만 부, 세계적으로 1000만 부 이상이 팔린 책이라는데, 애초 베스트셀러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던 나로선 굳이 사서 읽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대학생이던 아들녀석이 사서 읽는 바람에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싶어 보다가 매료되었던 책이다. 그때가 5~6년 전이다. 몇 년 뒤 진주 어른 김장하 선생을 취재하던 중 그분의 삶에서 아들러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대가 없는 나눔, 간섭 없는 지원, 바라는 것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는 보시를 실천해온 분이 김장하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선생에게 살아오면..

함안총쇄록 답사기 (24) 머물러 달라고 만인산, 보내기 아쉬워 선정비

오횡묵이 함안군수로 있었던 기간은 3년 10개월 남짓이다. 1889년 4월 21일 자인에서 들어와 1893년 2월 27일 고성으로 나갔다. 이 시기에 오횡묵은 지역사회의 여러 폐단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멋대로 설치며 횡포를 부리는 일부 양반부터 먼저 때려잡았다. 아전과 결탁하여 백성들 등쳐먹고 군수를 능멸하는 적폐 중의 적폐였다. 아전과 백성들이 빼돌리거나 떼어먹어 엄청나게 밀려 있던 조세도 한 해만에 별 탈 없이 정리했다. 아전·장교와 관노·사령들도 농간을 부리지 못하도록 제대로 다잡았다. 근본인 농사를 위해서도 잘되도록 돌보느라 크게 애썼다. 들판에 나가 보이는대로 돈과 담배(남)와 바늘(여)을 나누어주면서 열심히 일하라고 타일렀다. 농사철을 앞두고는 제방 쌓는 공사를 몸소 감독하였다. 몹시 가물 때..

함안총쇄록 답사기 (23) 함안 명물 감·수박·연꽃, 그때도 명물이었나

함안은 감이 유명하다. 가을이면 대봉감이 주렁주렁 열리고 겨울이면 깎아 말린 곶감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크기도 작지 않고 달콤하기도 처지지 않는다. 여항면과 함안면·가야읍 일대에서 많이 난다. 수박도 이름이 높다. 옛날에는 여름에만 났지만 2010년대 들어서부터는 겨울에도 쏟아져 나온다. 함안이 전국 생산의 10%를 차지하는데 군북면·법수면과 대산면·가야읍이 주산지다. 연꽃도 손꼽힌다. ‘법수옥수홍련’과 ‘아라홍련’의 본고장이다. 법수면 옥수늪 일대에서 자생하던 법수옥수홍련은 1100년 전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라홍련은 고려시대 연밥이 성산산성 연못에 잠들어 있다가 700년 세월을 건너뛰어 피어났다. 라그렇다면 이렇게 풍성한 감과 수박과 연꽃이 오횡묵 시절에는 어떤 상태에 있었을까? 감은 ..

함안총쇄록 답사기 (22) 객사는 없어졌어도 향교는 옛날 그대로

원님 통치의 주무대였고 임금 상징하던 객사는 가뭇없이 사라졌어도 유교 이념 확산 거점 향교는 오횡묵이 보던 모습 간직, 우람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증인 조선은 민국(民國)이 아니라 왕국(王國)이었다. 일반 국민이 아닌 임금이 주권자였다. 임금을 상징하는 객사(客舍)가 고을에서 동헌보다 더 크고 높았던 까닭이다. 객사는 한가운데 높은 자리에 임금을 대신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있었다. 조선은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가 지배하는 나라이기도 했다. 향교(鄕校)는 요즘 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되지만 교육 기능만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자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이었다. 여러 의식과 행사로 양반과 일반 백성에 대한 수령의 영향력을 넓히는 문화·행정 기능도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님에게 객사와 향교는 관아..

그야말로 옛날식 도리깨의 기억

1. 오랜만에 본 옛날 그 도리깨 며칠 전 나는 고성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아침에 선선할 때 나섰지만 날씨는 금세 더워졌다. 바람은 시원했으나 햇볕이 뜨거웠다. 모터배 아닌 노배라도 나타날까 싶어 바다에 눈길을 주고 걷는데 어디선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탁 탁.” “퍽 퍽.”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도리깨로 보리 타작을 하는구나.’ 고개를 돌려 언덕 위를 올려보았다. 할머니 한 분이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다듬고 있고 할아버지 한 분이 서서 도리깨를 돌리고 있었다. 쇠나 플라스틱으로 조립한 요즘식 도리깨가 아니고 대나무로 얽은 옛날식 도리깨였다. ‘그렇지, 요즘 도리깨로는 저런 소리가 안 나지.’ 2. 도리깨로 콩타작을 하면 나는 저 도리깨를 기억하고 있다. 옛날 시골 ..

함안총쇄록 답사기 (21) 습지 정경 속 보와 제방

큰물 거뜬히 막아낸 함안 번영 일등공신 내륙인데도 어촌 형성되고 낚시 생업도 많아 습지 많아 침수는 잦았지만 가뭄은 덜했고 함안은 습지의 고장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낙동강과 남강이 함안을 감싸고 흐르기 때문이다. 오횡묵이 1889년 4월 22일 읽은 에도 나온다. ‘형승(形勝)’ 조항에서 가장 먼저 “낙동강과 풍탄(楓灘)이 북쪽에 가로 놓여 있다”고 했다. 풍탄은 함안군 법수면과 의령군 정곡면 사이 여울이지만 여기서는 함안에 걸쳐 흐르는 남강 전체를 이른다. ‘형승’ 조항은 이어서 “여항산과 파산이 남쪽을 누르고 있다”고 적었다. 얼핏 보면 산은 습지와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높든 낮든 산이 있으면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도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물줄기..

멀리 떨어져 있어도 모국이 잘 보이는 까닭은

오랜 이민생활 끝에 알게 된 타산지석 전직 기자 필력으로 흥미롭게 녹여내 21년 전, 13년 차 기자 성우제는 장애를 가진 자녀 때문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한국에서는 아무렇게나 방치되는 장애인을 캐나다에서는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잘나가는 시사잡지 기자 생활을 접고 월급을 모은 돈과 아파트 판 돈을 갖고 캐나다로 날아갔다. 원래 이민이란 게 몇십 년 살아온 자신의 뿌리를 통째 뽑아 옮기는 존재의 결단이다. 그래서 새로 잔뿌리를 내리지도 못한 이민 초기는 새로운 정착과 생존을 위한 고달픈 몸부림의 연속이었다. 그에게는 아이를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뚜렷한 이유가 있었기에 그 몸부림은 더욱 절박하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자영업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준비 작업으..

함안총쇄록 답사기 (19) 비 올 때까지 지냈던 코리안기우제

가물 땐 깜깜무소식 비 올 땐 억수처럼 경국대전은 최대 12차례 규정했지만 오횡묵은 공식 13차례 비공식 2차례 “몰래 쓴 무덤 부정 탄다”며 모두 파내고 신령·용 얽힌 영험처 옮겨 다니며 기도 해갈된 뒤엔 닷새 폭우로 수재도 겪어 가뭄은 예로부터 인간 사회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주는 엄청난 자연재해였다. 그나마 요즘은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나름대로 대응할 방책이라도 있지만 옛날에는 그대로 꼼짝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재난을 맞닥뜨리면 대부분 백성들은 처음에는 나름 이겨내려고 애를 쓰지만 한계를 넘으면 임금이나 수령을 원망하기 마련이다. 조세를 거두고 지배하고 명령하고 집행했으면 그에 걸맞게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임금이나 수령인들 별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효과가 있든 ..

손혜원 똘끼는 어디까지 갈까?

보름쯤 전에 전라도 목포 옛 도심 거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의 성우제 작가와 함께였다. 먼저 ‘창성장’에 들렀다가 문이 잠겨 있기에 ‘손소영갤러리앤카페’를 찾았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소품도 하나 장만했는데 둘 다 괜찮았다. 이 두 곳은 2019년 초입에 신문 방송이 떠들썩하게 들끓었던 손혜원 당시 국회의원의 조카들이 운영하고 있는 가게들이다. 옛 도심 거리는 지금이나 4년 전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더 가꿔져 있고 조금 더 차분해져 있는 것이 달랐다. 1. 조선일보류는 투기라 했고 그때 신문 방송들은 손혜원 의원이 투기를 위해 알박기 차원에서 조카들 이름으로 건물을 구입했다는 식으로 연일 보도해댔다. 보통 사람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목포시의 비밀스러운 정보를 활용했다고도 했다. 정치적으로 목적이..

함안총쇄록 답사기 (17) 한강 정구 놀았던 멋진 별천계곡

명망 두터웠던 선배 군수 한강 정구 즐겨 찾던 유적에 흔적 뚜렷 오횡묵, 여러 번 들러 찬양 글자 새기고 시집도 펴내 오횡묵보다 300년 가량 앞선 시기에 함안에서 군수를 지낸 인물로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년)가 있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모두에게서 배웠고 따로 한강 학파를 이룰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다. 역대 함안군수 가운데 인품과 학문이 가장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함안 사람들은 지금도 한강 정구를 많이 기억하고 높이 받들고 있다. 한강 정구의 작품 함안 사람들에게 정구는 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함안군수로 있으면서 지역 역량을 끌어모아 를 편찬했던 것이다. 함안의 산천과 인물·문화·산물을 담은 함주지는 지금껏 남아 있는 우리나라 읍지(邑誌) 가운데 가장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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