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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182

소나무는 독야청청 아닌 생긴대로 사는 나무

소나무는 독야청청하다 사람들은 소나무를 두고 '독야청청(獨也靑靑)'하다고들 합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잎을 지워도 소나무만큼은 저 홀로 푸르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모두 절개를 꺾는 가운데서도 홀로 절개를 굳세게 지킴을 이르는 데에 더 많이 쓰입니다. 사람들이 소나무를 좋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나무처럼 살고 싶어하는 마음도 여기에는 조금 들어 있을 것입니다. 소나무는 홀로 있습니다. 아울러 특히 추운 겨울에 보면 매우 불쌍하지는 않고 적당히 가난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소나무가 별 욕심도 없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휘둘리지 않으면서 저 혼자 푸르게 산다고 여깁니다. 세월 풍파를 겪어서, 이리저리 휘이고 꺾이고는 했을지언정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나무를 더욱 높게 치는 것 같습니다. 소나무..

노래 공연장에 등장한 깡통 로봇 물고기

마산에는 김산이라는 지역 가수가 있습니다. 80년대 노래운동을 벌였던 사람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2008년부터 본격으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2008년부터 환경 사랑 콘서트를 열어오다가 이번에는 이름을 바꿔 생명 평화 콘서트를 치렀습니다. 이번 콘서트를 치르면서, 우리 경남낙사모에서 지율 스님 낙동강 사진을 빌려가서 공연장을 꾸미겠다고 했습니다. 우리야 이렇게 활용해 주면 그냥 좋은 일이기 때문에 11월 10일 함안 가야장 낙동강 사진전을 마치고 나서 11일 오후 아주 고마운 마음으로 전해드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공연이 열리는 어제 12일 저녁 7시에 마산 창동 예술 소극장으로 갔습니다. 어떻게 하고 있나 확인을 하려고요. 사람이 적어서 탈이기는 했지만, 우리가 빌려드린 사진은 잘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자연에 대한 삽질과 아이에 대한 매질

1. 삶터가 망가져도 떠나지 못하는 동물들 사람들이 종종 착각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연 생태가 망가지면 거기에는 동물이 얼씬도 하지 않는 줄 아는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말하자면, 굴착기가 시끄럽게 소리를 내며 삽질을 해대면 노루나 고라니 멧돼지 같이 거기서 살고 있던 동물들이 그냥 자리를 뜨고는 돌아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 셈입니다. 그런데 낙동강 강변으로 걸어들어가 보니 전혀 아니었습니다. 망가진 자연 생태에서도 동물은 살고 있었습니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망가진 땅으로 들어와 돌아다닌 자취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자취를 물끄러미 내려보면서, 자연 생태가 망가졌어도, 자기네 삶의 사이클에서 망가진 그 땅이 바로 필요가 없어져 떼어내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

거제 신선대에서 찍은 저녁 바다 사진

10월 1일 거제도에 다녀왔습니다. 하늘은 높고 날씨는 맑았으며 바람은 상큼하기만 했습니다. 조금 더운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이리저리 거닐기에 크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늦은 점심을 먹고 4시가 넘어서 남부면에 있는 바람의 언덕을 들렀습니다. 바람의 언덕 위쪽 동백 숲에 갔는데 거기서 베트남 출신으로 보이는 외국인 며느리와 함께 동백 열매를 줍는 중년 여자를 봤습니다. 옛날 같으면 저 외국인 며느리가 여기서 행복한 나날을 보낼까,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와서 낯선 나라 구석진 바닷가 동백 아래에서 그 열매를 줍게 됐을까 따위 생각을 했겠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게 바뀌었습니다. 그냥 그저 그렇게 저기 베트남 출신으로 보이는 여자 하나가 자기 시어머니랑 함께 와서 열매를 줍고 있구나, 여길 따름이지요..

강변 쓰레기와 나무에 걸린 비닐을 보는 다른 생각

7월 9일 창녕군 남지읍 낙동강 개비리길을 걸으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강변 낭떠러지에 기대어 자란 나무에 비닐이 걸려 너덜거리고 있습니다. 비닐들은 옛날 강물이 불어넘칠 적에 강물과 더불어 흐르다가 걸린 것입니다. 사진 찍을 당시, 비닐에서 아래 강물까지는 10m도 넘게 떨어져 있습니다. 어쩌면 20m 이상으로도 보였습니다. 강물의 범람은 이처럼 우리가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일어납니다. 옛날 제가 이런 사실을 몰랐을 때에는 나무에 비닐이 걸려 펄럭이는 모습을 보면 "일부러 저런 데 흉물스럽게 걸어놓다니 참 할 일 없는 사람도 많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어쨌거나, 그 날 이런 사진을 찍고 있으려니까 2006년 11월 김해 화포천을 찾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 때 거기서 이런 제방 모습을 보면서 생각..

낙동강 모래톱만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는 고향이 창녕입니다. 제가 사는 창원에서 고향으로 가는 길이 여럿 있지만, 저는 창원 북면이나 동읍을 거쳐 본포다리를 건너 창녕으로 가는 길을 좋아했습니다. 본포다리를 건너 가다 보면 눈에 뜨이는 유장한 모래톱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래톱은 아주 길고 커서 한 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또 마치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기도 해서, 옛날에는 이런 모습으로 있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창원 북면이나 맞은편 창녕 부곡면에서 오래 사신 이들에 따르면, 50년 단위로 이쪽 저쪽 옮겨 다니는 존재랍니다. 그런데 요즘은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으면 이쪽으로 걸음을 하지 않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리 한가운데 자동차를 세워놓으면서까지 내려서 이리저리 거닐기도 하고 바람도 쐬고 오래 내려다..

밀양 표충사에는 동전 수북한 샘물이 있다

1. 일석(一石) 이희승 선생 일석 이희승(1896~1989) 선생이 있습니다. 일석 선생은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탄압을 받았던 빼어난 국어학자이기도 하지만 수필도 아주 잘 썼습니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일석 선생이 쓴 수필집 가 있었습니다. 표제작인 '한 개의 돌이로다'에는 당신이 호(號)를 일석(一石)이라 짓게 된 경위가 나옵니다. 40년이 다 된 일이기는 하지만 그 때 읽은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일석 이희승 선생이 원래 지어 가졌던 호는 천석(泉石)이라 했습니다. 둘 다 조그맣고 또 소중한 존재는 아니지만 돌처럼 변함없고 샘처럼 새롭기를 바라서 지은 호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 호에 천(泉)이 들어가는 경우가 참 많더라고 했습니다. 그래 알아보니까 일..

우리 집 달래는 아름답고 힘도 세다

딸 현지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그러니까 2005년 봄 창원 주남저수지 둘레에 딸과 함께 나들이 갔다가 욕심을 내어 담아온 달래가 몇 뿌리 있습니다. 저는 이 녀석이 못내 시들시들해서 곧 죽어버릴 줄 알았습니다. 담아올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화분에다 심으니까 곧장 그리 됐습니다. 그러나 달래가 쉬이 자기 목숨을 거두지는 않았습니다. 비실거리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저는 녀석이 안쓰러웠지만, 원래 담아왔던 데에다 내다 놓지도 못했습니다. 어떤 분이 이르기를, '집에서 키우는 동안 야성(野性)을 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바깥에 내어놓으면 바로 죽고 만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름에 창문 밖에 내어놓았습니다. 만약 죽을 조짐이 보이면 바로 거둬 넣으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내어놓을 ..

아메리카 원주민은 불쌍한 존재일까

북남아메리카 원주민은 불쌍한 존재랍니다. "한반도보다 40배나 넓은 대륙을 다 빼앗기고 학살되거나 아니면 이른바 '보호구역'에 갇힌 바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들 주식이었던 들소(buffalo)도 한 때 6000만 마리를 웃돌았으나 총잡이들에게 전멸되다시피 해 겨우 3000마리로 줄어 멸종위기 동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이들 불쌍함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원래 이름까지 잃고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일제강점기 우리가 '조센징'이라 불리며 열등 국민 취급을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1492년에, 덜 떨어진 인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라왁(Arawak)이라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를 인도(Indies)라 하고, 그 원주민을 인디언(Indian)이라 한 이래로, 북남미 토착민들은 인디언이 되고 말았답..

신문 창간 11주년에 독자들께 올린 편지

조금 시간이 지났지만, 2010년 5월 11일이 저희 창간 11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대표이사 사장도 공석이고 해서 별다른 행사는 하지 않았지만 기념호 발행은 했더랬습니다. 보는 이에 따라 억지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작대기 두 개가 나란히 있는 11주년의 '11'에 힌트를 얻었습니다. '11'과 닮은 길을 기획 주제로 삼아 창간 기획 내용을 꾸리고 기념호 1면은 사진 한 장으로 크게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1면에 창간 취지와 앞으로 포부를 밝히는 글을 싣기로 했는데, 어찌어찌하다 제가 그 글을 쓰는 보람을 누리게 됐습니다. 물론 제가 봐도 아주 빼어나지 않은 범문(凡文)밖에 안 됩니다만, 그럭저럭 진심이 조금은 어려 있는 그런 느낌을 주지 싶다는 생각이 약간 듭니다. ^.^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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