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암행어사 박문수가 절에 시주한 까닭은?

김훤주 2009. 6. 17.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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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원에는 국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보물도 겨우 하나뿐입니다. 불곡사 석조 비로자나불상(보물 436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밖에 봉림사 터 진경대사보월능공탑과 탑비가 보물 362호와 363호로 지정돼 있습니다만 일제 강점기 수탈 반출돼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창원 성주사(주지 원정 스님)가 대웅전 삼존불 등을 문화재청에 보물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5월 28일 복장 유물을 수습하면서, 만든 시기가 350년 전인 1655년으로 확인된 석가모니불상과 아미타·약사불상, 영산전의 석가모니불과 지장전 지장보살상이 대상입니다.

특히 대웅전 목조 삼존불 가운데 석가모니불 복장(腹藏)에서는 '창원 웅신사 신조 불상 시주기'(1655년)와 복장문(1729년) 등 유물이 발견돼 당시 시대상과 조성 경위 등을 일러줍니다. 대웅전과 영산전에 있는 불상을 개금하기 앞서 원정 스님과 고영훈(경상대 교수)·이영현(동아대 교수) 문화재위원, 김태종 신도회장 등이 입회한 가운데 복장 유물을 확인했을 때 이런 문서가 나왔답니다.

성주사 대웅전과 영산전 전경. 당연히 오른쪽 작은 전각이 영산전입니다.

성주사는 "복장 유물 확인에 입회한 문화재위원들에게서 대웅전 목조 삼존불상과 영산전 석가모니불상 등이 보존 상태가 좋고 불상 조각이 섬세해 예술성이 높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들 불상과 지장전 지장보살상을 보물로 지정해 달라고 문화재청에 신청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2.
발견된 유물에서 관심이 쏠리는 대목은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진 박문수(1691~1756) 관련 기록과 '웅신사(熊神寺)'라는 절간 이름입니다. 박문수는 1729년(영조 5) 복장문에 나오고 웅신사는 1655년(효종 5) 시주기에 나옵니다.

성주사는 835년(신라 흥덕왕 10) 무염(無染)국사가 왜구를 막기 위해 지은 절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주사를 두고 곰절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불타 없어졌다가 1604년 다시 세울 때 곰이 나와 건축 자재를 옮기는 불사(佛事)를 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창원 웅신사 신조 불상 시주기. 불교신문 사진.


이번 1655년 시주기에 나오는 글자 '웅신사'가 이를 확인해 줍니다. 1604년과 1655년 사이에 이름이 성주사에서 웅신사로 바뀌었음을 일러주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1729년 작성된 복장문은 '경상우도 창원 남면 불모산 성주사'로 시작됩니다. 불상을 처음 조성하던 1655년에는 웅신사였다가 70년 남짓 지난 1729년 개금 불사를 할 때는 다시 원래 이름인 성주사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 두고 김태종 신도회장은 "불상이 만들어진 시기를 정확하게 알게 됐을 뿐 아니라 절간 이름이 성주사에서 웅신사로, 웅신사에서 다시 성주사로 두 차례에 걸쳐 바뀌었다는 사실이 문자로 확인됐다는 의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진 박문수가 나오는 개금불사 복장문. 불교신문 사진.


3.
다음으로는 박문수가 됩니다. 박문수는 많은 이들에게 탐관오리(이를테면 <춘향전>의 변학도 같은)를 혼내주고 벼슬아치들의 가렴주구를 응징하며 가난한 서민 백성들 편을 드는 기특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나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그린 만화책이 지금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습니다. 

1729년 복장문에 "본도 방백(本道 方伯) 박문수"가 나옵니다. 박문수가 1727년 영남 암행어사를 지냈고 이듬해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서 경상도 관찰사가 됐다는 사실에 비추면 동일 인물일 개연성이 아주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창원향토사연구회 권순학씨는 "당시 진행한 개금불사에 시주를 했어야만 복장문에 이름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며 "그렇다면 숭유억불이 엄청났던 당시 시대상에서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어사 박문수가 경상우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불상 개금하는 데 재물을 보탰다는 얘기입니다.

권순학씨는 이어 "박문수와 관련해서는 아자방이 있는 칠불암 등 절간 100여 개를 폐사하려고 지리산 화개동천에 갔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는 등 여러 설화가 있는데, 이번에 복장 유물 연구를 통해 사실 관계가 어느 정도 밝혀지리라 기대한다"고도 했습니다.

권순학씨 이 말에는 박문수가 불교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경험을 했고 이로 말미암아 불교를 믿게 됐으며 그 결과 이렇게 시주를 하게 됐다는 뜻이 깔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아마 이번에 보물 신청과 맞물려 문화재청이 검토하는 과정에서 확인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아직 수습 조사하지 않은 복장 유물이 아주 많거든요. 

당시 경상우도 관아는 창원이나 마산이 아니라 진주에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창원은 군사기지였고 마산은 한적한 어촌이었을 뿐입니다. 진주에서 창원 성주사까지는 지금이야 한 시간 남짓밖에 안 걸리지만 그 때는 아주 먼 길이었습니다. 오가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성주사가 아주 큰 절이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동 쌍계사보다 작습니다. 그래서, 박문수가 성주사랑 특별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시주를 했으리라 저는 짐작합니다. 관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규모도 크지 않은 절에 관찰사가 일부러 재물을 시주할 까닭이 뾰족하게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숭유억불 시절이라, 함양 일두 정여창 무덤에서 보듯 승안사 절터를 그대로 묘지로 쓰거나 거기 있는 석재로 바로 무덤 축대를 쌓아도 아무 말 못했습니다.  남명 조식 유두류록에서 보이듯이, 양반이 쌍계사에 들어가 법당에서 기생을 끼고 술을 마셔도 까딱없는 그런 시절에 이리 시주를 한 것은 아주 특별해 보입니다.

성주사 들머리 골짜기 그윽한 풍경.


4.
이들 불상이 문화재청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보물로 지정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복장 유물도 이번에 수습한 문서들말고는 대부분이 그대로 있다는데, 문화재청 조사 과정에서 이들에 대해서도 연구가 잘 돼 박문수가 왜 시주를 했는지 확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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