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화가 이재이가 쓸쓸해보이는 까닭

김훤주 2009. 6. 1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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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는 왜 목욕탕에서 헤엄치는가'. <월간 미술> 2009년 5월호에 실린 성우제의 글입니다. 보면 아시겠지만 성우제는 <시사저널> 기자를 지냈던 사람입니다. 이 글은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의 젊은 작가를 소개하는 연재의 첫 편이랍니다.

KAFA의 11회 수상자인 이재이(Rhee Jaye)가 대상입니다. '목욕탕 실험'을 통해 '인식의 전복'을 행하고 있답니다. KAFA는, Korea Arts Foundation of America Award라 소개돼 있습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사는 한국인 미술 애호가들이 1989년 결성한 단체입니다.

성우제가 쓴 이 글을 읽었습니다. 읽고 나서 소감을 한 마디 덧붙입니다. 좋다 나쁘다 이런 이야기보다는, 저는 그냥 제 이야기가 하고 싶었습니다. 미리 일러두지만, 저는 미술이나 비디오 작품은 거의 모릅니다.


1. 사진을 보고 글을 보니 이재이가 열심히 미술 하는 줄 알겠다

129쪽을 들여다봤습니다. 이재이(로 보이는) 사진이 나옵니다. 아마도, 성우제가 찍었거나, 아니면 팸플릿에 나오는 사진일 것입니다. 처음에는 '무슨 여자가 저래?' 하는 느낌만 받았습니다. 여자치고는 어깨가 크고 넓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우제의 글을 읽고 나서 '무슨 여자가 왜 저랬는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알고 나서 저는 좀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제가 여자를 여자로 보는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했구나, 싶어서요. 하하.

'예술이기 때문에 용납되는 단순 반복 노동' 때문이겠는데, 이 말은 멋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예술이기 때문에'와 '용납되는' 사이에는 '자기에게'가 생략됐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예술이 아니면 용납되지 않는 단순 반복 노동'과 뜻이 같아져서 아주 비열해집니다. 이를테면, 숱하게 많은 이들에게는 여기 이 '단순 반복 노동'이 '생계 수단이기 때문에 용납'되는데, 그렇다면 두 단순반복노동이 양립할 수가 없겠기 때문입니다.

129쪽입니다. "<바다를보았다(Seasaw)>, <벚꽃피다(Cherry Blossom)>의 전복은 색다른 양상이다. 작가는 어릴 적 침대 옆의 벽에다 파란 색칠을 하며 뛰어놀던 추억을 되살렸다. 사람 키 높이의 기둥 2개를 5m 간격으로 세우고, 그 두 기둥 사이를 오가며 실로 촘촘하게 감아 올라가는 퍼포먼스를 무려 10시간에 걸쳐 계속했다. 바닥에서부터 갖가지 푸른 빛깔이 알록달록하게 위로 올라가면서 하얀 공간은 순식간에 바다로 변해버린다. 파도 소리까지 곁들여지니, '이것이 바로 바다 풍경'이라고 소개하면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가짜를 진짜라고 믿는 고정관념에 대한 일종의 야유인데, 그 야유는 <벚꽃피다>에서 더 거칠게 드러난다. 핑크빛 화면에 뭔가가 툭, 툭, 떨어진다. 껌을 씹어 뱉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벚꽃이 날리는 풍경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같은 129쪽 몇 줄 아래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보는 사람이 지루해할 정도로 단순 노동을 장시간 반복하고 있다. 10시간 넘게 기둥에 실을 감아 올리고, 5시간 동안 껌을 씹어 뱉는가 하면, 온몸으로 천을 천천히 찢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차가운 물에 몸이 퉁퉁 불을 만큼 오랜 시간 몸을 담그며 '위조의 세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작가는 '예술이기 때문에 용납되는 단순 반복 노동'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는 고정관념 혹은 욕망도 이렇듯 오랜 시간이 걸려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2. 이상하게도 나는 '전복'을 '전복'해보고 싶다

128쪽으로 갑니다. "'한국의 목욕탕에서 벽화를 발견하고는 심봤다!고 느꼈다. 작품이 내게 막 걸어오는 듯했다.' 이른바 '목욕탕 시리즈'로 명명된 작품 <백조>, <북극곰>, <나이애가라>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작품은 우선 만드는 나부터 재미있어야 한다'고 이씨는 말했다. 작가가 느끼는 그 재미는 보는 이에게도 어렵지 않게 전달되어, 목욕탕 시리즈 앞에 서면 웃음부터 나오게 마련이다.

사우나 냉탕의 벽화는 그 냉탕을 시각적으로 더욱 차갑게 만든다. 이발소 그림이 순전히 실내 장식용이라면, 목욕탕 벽화는 장식뿐 아니라 실용성까지 두루 갖춘 '작품'인 것이다. 백곰들이 보이는 북극이나 백조가 노니는 호수 풍경을 보면 냉탕은 더욱 차갑게 느껴지지 않을까? 작가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스스로 북극곰과 백조가 되어, '냉탕 호수'에서 유영하며 북극의 풍경과 백조의 호수를 완성한다.

이재이의 '전복'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북극과 백조의 호수를 이렇게 눈에 익도록 추상화한 목욕탕의 벽화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감고도 그리는 그곳 풍경이다. 그 키치(Kitsch)적 풍경이 있고, 실제 호수(냉탕)가 있고 그 호수 안에 백곰과 백조들까지 노닐고 있으니 눈으로 보기에는 전형적인 그곳의 풍경이다. 작가는 '북극'이나 '백조의 호수'는, 우리가 머릿속에 임의로 그려놓은 이같은 풍경으로 존재할 뿐, 이런 풍경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쯤에서 저는 작가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데? 잘은 모르지만, 대답은 이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냥. 그냥 그렇다는 말이지. 그런데 그런 질문을 왜 나한테 하는데? 맞습니다. 작가는 이렇다, 까지만 해도 많이 한 편입니다. 그러고 보면 제 물음은 월권이라는 의심을 충분히 살 수도 있습니다.

성우제의 글은 곧바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안다고 혹은 본다고 믿는 것, 그것은 '안다고' '본다고' 욕망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그와 다르다는 얘기다.

<나이애가라>를 보면 그 뜻이 좀더 분명해진다. 나이애가라에 가 보면 우리가 알고 있음직한, 사진에서 보는 나이애가라 폭포의 존재는 진짜로 보기 어렵다. 다만 여행 가이드와 같은 내가 아닌 남이 '이게 나이애가라다'라고 설명하는 대로 나이애가라는 보인다. 작가가 보기에, 우리가 믿는 것은 남의 지시에 따라 본 것일 뿐, 내가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재이의 화면에 나오는 사람들은 목욕탕 안에서 우비를 뒤집어쓰고 '나이애가라' 그림 앞에서 나이애가라를 '보는' 대신 여행 가이드의 설명을 진지하게 '듣는다'."

3. 공지영을 떠올리게 하는 이재이의 작업

여기서 저는 공지영을 떠올렸습니다. 공지영 스스로도 지금 돌이켜보면 조금은 치기 어린 작품이라 할 수 있을 1994년 펴낸 소설책 <고등어> 242~243쪽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쓸데없는 부분은 떼어내고, 한 번 옮겨와 보겠습니다.

"카페 벽에는 마치 이 카페의 벽처럼 흰 벽돌로 지은 집들이 야자수 사이사이로 늘어선 그림이 있고 그 아래 카사블랑카라는 글씨가 써 있었다. 카사블랑카 도시의 한 풍경인 모양이었다. 아름다웠다.

아마 저 그림을 그린 화가나, 저 화가의 모델이 되어 준 저 도시의 저 집에 사는 사람이나 저 그림들이 한국이라는 극동의 작은 나라 어느 여자 대학 앞에 걸리게 될 줄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저 집들 속에는 아마도 지금도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은 아이들이 울면서 양치질을 하고 연인이 침실에 들어 정열적인 키스를 나누고 부부가 후라이팬을 던지며 싸움을 벌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들은 이 카페에 앉아서 카사블랑카를 생각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없는 카사블랑카를."

말 뜻 그대로, 이 둘이 흡사(恰似)하지 않습니까? <나이애가라>와 <카사블랑카>라는 차이만 지우고 나면 그야말로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요? 어쨌거나 저는, 우리의 모든 인식 작용이 저렇지만은 아니리라 생각하고, 인식 작용이 저렇게 되는 데에는 어떤 시스템이 작용하리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재이의 작업이나 공지영의 서술이 '인식의 전복'까지만 나아갈 뿐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고 저는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어떤 시스템을 보지 못했거나 적어도 눈길을 짐짓 다른 데로 돌렸거나 싶은 것이지요. 물론 작가의 탓으로 남을 일은 아니지만, 결국 작품을 보고 느끼는 사람들이 마저 해야 할 몫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저는 그 '인식의 전복'을 한 번 더 '전복(顚覆)'해 보고 싶습니다. 사실은 전복이라는 말보다, 뒤집어보기 또는 되짚어보기 또는 되돌려보기라고 하는 편이 더 알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러니까, "우리가 안다고 혹은 본다고 믿는 것, 그것은 '안다고' '본다고' 욕망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그와 다르다는 얘기다."라 했는데, 그리 착시(錯視)하도록 만드는 세력이 있는지, 있다면 목적이 무엇인지 좀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세력이 아니라 어떤 시스템이 있다면, 그 시스템은 누구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지도 함께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설마, 이런 착시를 두고 사회구조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았고 자연발생적 현상일 뿐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요.

4. 쓸쓸함이 뭔지 아는 듯한 이재이

129쪽에 나오는 이재이. 저는 좀 쓸쓸함이 묻어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성우제는 "인터뷰 중에 이재이는 한국 시인과 시들을 자주 화제에 올렸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고정관념을 깬 세상이 시인이 쓰는 시의 세계라면, 이재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바로 그 시의 세계와 닮아 보였다"고 붙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제대로 된 시인이라면 안팎에 상처가 없을 수 없습니다. 성우제식으로 고정관념과 관련지어 말하자면, '고정관념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고정관념을 깨는 수도 있고' '고정관념을 깨느라 상처를 입는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고정관념과는 전혀 무관하게 상처를 입게 됐는데, 고정관념이 그 상처를 덧나게 해서 고정관념을 깨는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덧난 상처 때문에 고정관념을 깨는 과정에서 한 번 더 고정관념에 상처를 입는 수도 있고요'.

이재이가 시를 자주 입에 올렸다니, 이재이(로 보이는) 사진이 주는 느낌을 한 마디 해 놓습니다. 쓸쓸함을 좀 아는 듯한 표정입니다. 쓸쓸함은, 내가 남과 같지 못하다는 자각이 없으면 느낄 수 없는 감정입니다. 내가 남과 같지 못하다는 자각은, 고정관념을 깨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고정관념을 깨려면, 내상이든 외상이든 상처를 입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재이(또는 이재이로 보이는 이)의 사진을 한 번 더 물끄러미 들여다봤습니다. 그 상처가 치명(致命)이 되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아울러, 그 상처로 말미암은(또는 말미암는) 이런저런 지평(들)이 좀 더 널러지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김훤주
※ 친구 성우제에게 제출하기로 약속한 독후감입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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