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서울로 수탈당한 경남 문화재들

김훤주 2009. 5. 1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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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브르는 안되고 중앙박물관은 괜찮다?

외규장각 도서는 프랑스에서 약탈해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가 있습니다. 직지심체요절도 프랑스에 있다는군요. 그렇다면 대한민국 안에서는 사정이 어떨까요? 제자리를 잃고 떠도는 경남 '출신' 문화재들은 얼마나 될까요?

경남뿐만 아니라 전라도나 충청도 또는 강원도 '출신' 문화재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는 서울에서 타향살이를 적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일부는 전시가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고 수장고에 쳐박혀 있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문화재 보호법 제3조는 "문화재의 보존·관리 및 활용은 원형 유지를 기본 원칙으로 한다"고 돼 있습니다. '원형 유지'를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원래 있던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설프게나마,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어떤 경남 '출신' 문화재들이 있는지 알아봤습니다. 땅에서 발굴된 문화재도 있고 탑이나 비도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에 가져가려던 것도 있고 해방 이후 발굴 또는 해체·수리로 자리를 옮긴 것도 있습니다.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경복궁에 있을 때 모습. 문화재청.


2. 수장고에 처박힌 창녕 교동 고분군 유물들

먼저 창녕 교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1920년대 기록에 따르면 일제는 여기서 열차 2량에 우마차 20대 분량을 파냈습니다. 일제는 이를 일본으로 가져가려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다행스럽게 대부분이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았습니다.

지금 일부는 국립김해박물관이나 국립진주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절대 다수는 포장도 풀지 않은 채 박물관 수장고 한 켠에 놓여 있답니다. 은제 팔찌, 청동제합, 말띠꾸미개 등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은제 팔찌는 교동 고분군 12호분에서 나왔습니다. 은으로 둥글게 만든 고리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삼국시대에 유행한 화려한 은제 장신구로, 표면에는 새김 눈을 넣거나 둥근 돌기 모양으로 장식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청동제합을 두고는 "반구(半球)상 몸체에는 돋을 선이 한 줄 돌아가며 뚜껑 손잡이는 보주(寶珠)형으로, 중요한 의식행사의 제기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6세기경 경주 지역에서 제작돼 신라의 지배 아래 있던 창녕 지역으로 유입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했습니다.

함안 도항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신세를 지고 있는 문화재가 적지 않습니다. '굽다리 접시(高杯)'가 이름나 있습니다. '불꽃무늬굽구멍굽다리접시(火焰文透窓高杯-화염문투창고배)'라고도 한다지요.

'청동삼환령'도 있지요.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가운데 둥근 고리에 작은 방울이 3개 붙은 형태입니다. 함안 도항리·함양 상백리·경주 안계리·장성 만무리 고분군 등 대체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신라와 가야 지역 고분에서 발견된답니다.

다호리에서 나온 통나무관.


3. 서울 못 벗어나다 고향엔 나들이만

1988년부터 1998년까지 창원 동읍 다호리 유적에서 건져낸 숱한 유적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일부는 지난해 11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시작해 지금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하고 있는 '갈대밭 속의 나라, 다호리-그 발굴과 기록 특별전'으로 나들이를 하고 있습니다.

철기와 토기는 물론이고 활과 화살과 화살통, 여러 가지 칠기, 통나무관이 나왔습니다. 율무와 밤과 감과 같은 과일들도 나와 당시 먹을거리를 짐작게 하고요, 우리나라서 처음 나온 붓은 문자를 썼음을 알려주는 유물입니다.

합천 반계제 가야고분에서 나온 '철제 금은입사 호등'도 있답니다. 호등은 말 탈 때 딛기 편하게 발에 끼우는 말갖춤이었습니다. 녹이 슬었지만 천마 무늬가 나오며 테두리는 용비늘로 장식돼 있습니다.

진경대사보월능공탑.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기 전 경복궁에 있는 모습 같습니다. 문화재청.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 경복궁에 있을 때 모습. 문화재청.


4. 창원 산청 산골 석탑이 중앙박물관 뜨락에 놓여

창원 봉림사터 '진경대사보월능공탑'과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와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물 362호와 363호인 보월능공탑과 탑비는 원래 창원 봉림동에 있었으나 일제가 1919년 서울로 가져갔습니다.

이 가운데 보월능공탑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마당에 놓여 있음이 확인됐지만 보월능공탑비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경복궁에서 지금 자리로 옮기는 과정에서 수장고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이보다 신세가 가련하답니다. 국보 105호인 이 석탑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 인터넷 안내문은 "범허사라는 산청의 옛 절터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41년께 일본인 골동상이 구입했으나 1947년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고 했습니다.

이 또한 경복궁에서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는 서울 용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수장고로 들어갔습니다. 올해 3월 <불교신문>은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없고 수장고 신세를 지고 있는데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일은 까마득하다고 보도했습니다.

5. 수장고 속 유물은 관리조차 안 돼

또 국보 제34호인 창녕 술정리 동3층석탑은 해체·복원 공사 와중에 알맹이가 어디 갔는지 오랫동안 모르게 되는 일도 겪었습니다. 이 탑에서는 1965년 12월 해체 당시 진신사리 용구 등이 발견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답니다.

<동아일보> 보도를 따르면 2003년 2월 17일 문화재청은 "인수 관련 문서 확인 결과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이던 덕수궁 미술관에 넘겨졌다"고 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은 "당시 인수는 박물관이 아닌 문화재 관리국 산하 덕수궁 사무소가 했으며 현재 소장 목록에는 없다"고 밝혔던 것입니다.

청동잔형 사리용기. 문화재청.

그러나 이틀 뒤 이들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발견이 됐습니다. 1966년 5월 <고고미술> 7호에서 해체 수리 발견 사진을 확인하는 등 유물을 찾아온 창녕 혜일 스님과 김해 윤광수씨의 애씀이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윤씨는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 유물 관리의 어처구니 없음을 짚으면서 '의식(意識)으로부터의 발굴'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아마, 본질적으로 문화재에 대한 올바른 의식이 정립(正立)돼 있었다면 애당초 벌어질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덧붙였습니다

이밖에도 많습니다. 의령에서 나온 고구려 유물인 국보 제119호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조선 유물 '왕자 숭수아지씨 백자항아리와 태지판', 양산에서 나온 '반가사유상', 김해서 출토된 '자루가 일단인 마제석검', 밀양 전(傳)영원사지 부도에서 나온 '청자 새 대나무 무늬 매병' 등도 마찬가지 신세입니다.

6. '원래 있던 자리로'라는 원칙을 그들은 모를까?

이런 일이 왜 벌어졌을까요? 또 왜 지금도 고쳐지지 않고 있을까요?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국가 단위 문화재 관리 기관들은 문화재를 원래대로 돌린다는 정책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해야 맞다는 생각조차 못할지도 모릅니다.

경남 자치단체도 문제입니다. 이토록 많은 문화재가 흩어져 있는데도, 대표적으로, 창녕군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억지로 잠재워져 있는 문화 유산들을 가져올 생각을 못합니다. 관광 어쩌구 말은 잘 떠들면서도 문화재가 관광과 관련된다고 여기지를 못하나 봅니다.

문화재 전문 공립 박물관도 별로 없습니다. 국립진주·국립김해박물관을 빼면 지난해 새로 지어 옮긴 밀양시립박물관과 거창박물관 김해대성동고분박물관 마산시립박물관 의령박물관 창녕박물관 통영시향토역사관 함안박물관 합천박물관 등 아홉 개가 전부입니다.

물론 같은 대한민국이니까, 프랑스가 약탈해 루브르 박물관에 갖다 놓은 외규장각 문서들처럼,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목숨을 걸고라도' '반드시' 되찾아 와야 하는 무엇으로 여겨야 한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문화재 보호법이 제3조에서 밝히고 있는 '문화재 보호의 기본 원칙'인 "보존 관리 활용은 원형 유지를 기본 원칙으로 한다"는 우리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제국 박물관은 거부하지만, 이것이 기본 원칙이니까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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