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우주에서 벌레랑도 교감하는 시인

김훤주 2009. 5. 19.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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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진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제가 최종진(53) 시인을 처음 만난 때는 2001년입니다. <그리움 돌돌 말아 피는 이슬꽃>이라는 시집을 냈다는 얘기를 듣고 그이가 사는 경남 양산으로 찾아갔더랬습니다.

최종진은, 예사 시인이 아니었습니다. 나쁜 뜻도 아니고 좋은 뜻도 아닙니다. 보통 보기 드문 그런 시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첫째 전신마비 장애 시인입니다. 둘째 더없이 절실한 심정으로 시를 씁니다. 셋째 시집을 평생에 걸쳐 딱 한 권만 내겠다고 했습니다.

전신마비 장애는 89년 무슨 벼락처럼 닥쳐왔습니다.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목 아래는 아예 움직이기도 어렵게 됐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혼자 힘으로는 '꼼짝'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감각이 거의 없어져서, 왼손으로 글을 쓰기도 합니다만 어림짐작으로 그리는 수준이라 해야 맞을 것입니다.

시를 쓰는 심정이 절실하다 함은, 그이 지금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책 보고 생각하고 시 쓰고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아마 팔 움직임이 자유롭다면 짧은 시 말고 여러 산문도 쓸 수 있겠지만, 손이나 입으로 어렵사리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는 자기 표현을 시(詩)말고는 달리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최종진 시인에게 시는 바로 밥이고 힘입니다. 그러니까 시 쓰기는 밥벌이가 되고 힘내기가 되는 셈입니다. 이것은 어떤 비유가 아닙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시가 왜 밥이냐고요? 간단합니다. 본인은 사고로 전신마비 장애가 됐습니다. 아내도 질병과 천성으로 몸이 안 좋아 밥벌이를 못합니다. 최종진 시인 부부와 어머니로 이뤄진 한 집안은 이런저런 도움을 주는 '고운님'들 덕분에 살아갑니다.

'고운님'들께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소식지 <징검다리>를 다달이 만들어 보내기 시작한 때는 1993년입니다.  물론, 당연히, '고운님'들과 최종진 시인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구실은 바로 그이가 쓰는 짧은 시가 합니다. <징검다리>를 처음에는 30부를 보냈으나 지금은 220부로 늘었답니다.

2009년 176신은 5월 4일 발송했습니다. 네 쪽짜리 <징검다리>는 첫머리에 최 시인의 시가 놓이고 둘째 셋째 쪽은 '고운님'들 도와준 내역이 들어갑니다. 마지막 넷째 쪽에는 그이가 읽은 책 가운데 뜻깊었던 한 구절이 자리잡습니다. 4월에 보낸 175신을 보자면 이렇습니다.

첫머리 시는 제목이 '가족'입니다.

하천부지에서 무농약으로 자란
김장배추를 몇 포기 뽑아 와서
하나씩 신문지에 둘둘 말아 두었다

배추시래기국을 끓여 먹든가
배추나물을 무쳐 먹든가 하면서
한 겨울을 날 생각이었다

한 포기를 꺼내 보니 배추벌레가
배추잎을 갉아 먹어 구멍이 숭숭했다
배추벌레를 옆 배추로 옮겨주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별에선가 만나면
추운 한 철을 같은 먹이를 먹고 지낸
추억을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주 차원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사람과 벌레를 높임 또는 낮춤 없이 똑같은 차원에서 바라보는, 그지없이 놀라운 관점이고 생각이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이어지는 둘째 쪽은, 제일 위에 '♡ 보살핌(3월)'이라 적혀 있고 그 아래 누구 얼마 어느 단체(모임) 얼마가 낱낱이 적혀 있습니다. 셋째 쪽에는 책 사탕 옷 채소 같은 현물도 나옵니다.

다치기 전에는 시를 쓰지 않았습니다만 1997년 어름에 시상(詩想)이 아주 많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장애인 문학 잡지 <솟대문학> 본상 수상이 97년이었고요 <열린지평> <한겨레21> <녹색평론> 등에도 시를 보냈는데 꽤 많이 실렸답니다. 본인도 신기해했답니다.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 존재를 스스로 인식하는 가장 힘 있는 일이 바로 시 쓰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종진 시인은 다쳤을 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실망이나 낙담이 크게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냥, '이렇게도 살아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랍니다. 오히려 이런 담담함 또는 평상심平常心이 여태 사는 데 더 큰 힘이 되지 않았을까, 앞으로 살아가는 데도 더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종진 시인은 2001년 시집 <그리움 돌돌 말아 피는 이슬꽃>을 펴냈습니다. 당시 최 시인은 이 시집 한 권만으로 안고 평생 살겠다고 했습니다. 고치고 다듬고 빼고 더하고 하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시인들처럼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시집을 내는 대신 말입니다.

2001년 초판 시집에는 90편이 실렸습니다. 2004년 개정판에서는 다섯 편을 빼고 열다섯 편을 더해 100편을 채웠습니다. 2007년 재개정판을 낼 때는 스물여덟 편을 더하고 빼서 100편을 유지했습니다. 재개정판은 이제 70권 정도 남았습니다. 이게 떨어지면 시인은 재재개정판을 낼 것입니다.

최종진 시인은 여태 쓴 시가 163편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재재개정판을 위해 100편과 120편을 골라뒀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필요한 시, 세상에 있어도 나쁘지 않은 시가 100편이면 충분하지 않느냐는 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드는지, 120편으로 재재개정판을 냈으면 하는데, 어떻게 될지 몰라 두 가지로 준비했다고 했습니다.

시집은 지금껏 6쇄 6000부가 발행됐지만 상업적으로는 거의 유통되지 않았습니다. 도와주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거나 집에 찾아오는 이들에게 주는 선물로만 썼기 때문입니다. 최종진 시인은 시를 '징검다리' 삼아서, '그리움 돌돌 말아 피는 이슬꽃'을 여러 사람에게 전했습니다. 이로써 그이는 든든한 '고운님'을 200명 넘게 얻게 됐습니다. 시와 삶, 삶과 시의 일치입니다.

그이 사는 데는 경남 양산시 평산동 새진흥7차아파트 201-107입니다. 전화는 055-364-2937이고요 카페는 cafe.daum.net/dewflowers, 입니다. 평생 전신마비를 안고 살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팔과 다리 움직임이 조금씩은 좋아지고 있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저기
어둠이 흐느끼네
나뭇잎에
풀잎에
저 혼자 외로워
밤을 지새며
눈물 떨구네

한밤 내
그리움 돌돌 말아
영롱한 보석
그 속에서
반짝
눈웃음치며
아침이 걸어나오네('이슬(1)' 전문)

김훤주
※ 미디어 비평 전문 인터넷 미디어 <미디어스>에 15일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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