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돈안되는 인문학강좌, 돈내고 들어보니…

기록하는 사람 2009. 5. 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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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벌면 과연 행복한 것일까?

잘 모르긴 하지만, '인문학'이란 바로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는 학문인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돈'이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자본주의에선 '인문학'이야말로 정말 '돈 안되는 학문'이며, '반(反)자본주의 학문'이 아닐 수 없다. 이미 '돈이 곧 행복'이라는 명확한 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가치질서를 교란시키려는 '불순한 목적'이 없고서야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대학에서조차 사멸(死滅) 위기에 놓인 인문학을 살리기 위해선 '돈이 되는 인문학을 해야 한다'는 궤변(詭辯)까지 나오고 있다. 인문학으로 돈 버는 방법을 연구하고 가르친다면 그게 과연 인문학일까 하는 의문을 넘어, 이젠 인문학마저 돈의 논리에 지배당하는 시대가 온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다.

◇5만 원을 내고 수강신청을 한 이유 = 어쨌든 이런 천박한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대한민국, 그것도 서울이 아닌 마산에서, 수강생들로부터 돈을 받아 그 비용으로 돈 안되는 인문학 강좌를 개설해보겠다는 무모한 단체가 있었다.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수요인문학 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마산YMCA(이사장 김종수)가 바로 그 단체다. 총 6강으로 진행되는 이 강좌의 수강료는 5만 원. 강사의 면면과 내용만 봐도 '돈'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지난 4월 8일 인문학자이자 서평가인 강유원 박사(철학)의 '인문학은 무엇이고,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라는 강의를 시작으로, 4월 15일 '유물과 유적을 통해 본 우리지역의 역사'(이상길 경남대 교수·고고학), 4월 22일 '습지와 인간'(김훤주 경남도민일보 기자), 4월 29일 '우리는 도시에 산다'(허정도 건축가·전 경남도민일보 사장) 등 강의가 이미 진행됐고, 오는 5월 6일 '중국의 역사와 문화적 다양성'(유장근 경남대 교수·중국사), 5월 13일 '여성과 젠더 정체성'(이혜숙 경상대 교수·사회학)이 예정돼 있다.

기자가 거금(?) 5만 원을 내고 선뜻 수강신청을 했던 것은 강사들의 면면이 대부분 개인적으로도 아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이런 '돈 안되는 강의'를 과연 어떤 사람들이 '돈을 내고' 들을 지 궁금했던 배경이 컸다. 아울러 각종 기관·단체의 예산지원을 받아 열리는 무료강좌나 토론회에도 일반 참석자들이 없어 썰렁하기 짝이 없는 판에, 과연 이런 유료강좌가 적자를 내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 확인해보고도 싶었다.

기자는 지난 3월 대전민주언론시민연합에 '지극히 실용적인' 블로그 강좌를 하러 간 적이 있다. 그 때 '대전시민아카데미'라는 단체를 봤는데, 이름 그대로 순전히 시민들의 교양을 위해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강좌들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단체였다. 주로 인문학강좌가 많았고, 입시경쟁에서 벗어나 올바른 자녀교육을 고민하는 학부모들을 위한 강좌도 있었다.

무슨 돈으로 그런 단체를 운영하느냐고 물었더니 '회원들의 회비와 시민들의 수강료로 어렵게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쉽지는 않을 게 뻔했지만, 그런 단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전시민들이 부러웠다. 경남엔 그런 시민교육 전문단체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차에 개설된 마산YMCA의 '수요인문학 강좌'가 성공한다면, 우리 지역에서도 '돈 안되는 강좌'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혀 돈과는 거리가 먼 강의들 = 첫 번째 강사로 온 강유원 박사는 배움마저 돈과 권세를 얻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세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에 대해서도 강 박사는 "억울하면 모두가 억울하지 않은 평등 세상을 만들자고 해야 하는데, 출세를 해서 남을 억누를 생각을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고 개탄했다.

강유원 박사의 강의는 너무 재미있어 여러번 폭소를 자아냈다.


"(예전에는) 많이 배우면 똑똑해지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배운 사람이 우리사회에 뭔가 기여하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많이 배운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고, 그냥 권세를 누리게 되었어요. 이제는 거꾸로 권세를 가진 자들이 부도 축적하여 배움까지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어요.
이제는 많이 배워서 유식해지고, 그것이 그 사람에게 교양이 되고, 우리사회의 중요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돈이 많은 사람들이 학벌을 장악하고, 그렇게 장악한 학벌을 가지고 사회에 계급적인 차단막을 쳐서 못올라오게 만드는 시대가 되어 버렸어요."

그러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흔히 교육비를 낮춰 교육의 기회균등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강 박사는 전혀 다른 해법을 제시했다.

아예, 공부를 해서 돈을 벌 수 있다든가, 공부를 해서 권세를 얻을 수 있다는 등식 자체를 깨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등식이 깨져야 핀란드식 교육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강유원 박사의 열강은 뒤풀이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강유원 박사의 이 강의에는 30명이 좀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다. 성공이었다. 어차피 강의실 좌석도 30개 이상 놓을 수가 없었다. 5만 원을 내고 6강좌 모두 수강신청을 한 사람이 25명, 1회 수강료 1만 5000원을 낸 사람도 서너 명 됐다.

첫 강의인데다, 서울에서 온 유명강사여서 그럴 수도 있었다. 남은 5개 강좌는 모두 지역사람들이 강사였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지역사람을 은근히 낮춰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든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이상길 교수의 강의에도 여전히 그만큼 강의실이 찼다. 이 교수는 그동안 자신이 발굴에 참여했던 선사시대 유적과 유물들을 사진으로 보여주며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내용으로 강의했다. 그러면서 권력이 형성되고, 전쟁이 발생하며,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생겨나는 과정을 설명해줬다.

세 번째 강의에 기자는 참석하지 못했다. <습지와 인간>의 저자인 김훤주 기자의 강의였는데, 같은 날 나는 또다른 '실용 강의'를 하기 위해 그날 저녁 다른 지역으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도 여전히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참석했고, 네 번째 강의인 허정도 전 사장의 강의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수강했다.

허정도 전 사장의 강의 역시 '돈 안되는' 내용이었다. 그는 '꾸리찌바'라는 도시의 예를 들어 "우리보다 훨씬 소득수준이 낮은 도시이지만, 꾸리찌바 시민들이 마산보다 훨씬 높은 삶의 질을 누리며 산다"고 설명했다.

건축가 허정도 박사의 강의에도 자리가 꽉 찼다.


또한 도시문제 해결을 위한 두 가지 방법으로 '기술주의'와 '문화주의'가 있다면서, "도로가 막히면 새 도로를 개설하거나 확장하는 게 기술주의인데, 이 경우 건설회사와 자동차회사만 돈을 벌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화주의는 길이 막힐 때 도로를 개설하기보다 버스 등 대중교통을 활성화시키는 정책을 쓴다"며 "바로 이런 문화주의적 해결법이 모든 시민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꾸리찌바에서는 버스를 타는 게 자가용을 타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편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동산 가격이 낮아야 주거의 질이 높아지고, 인구가 적어야 쾌적한 삶이 가능하다면서 '과연 큰 도시가 좋은 도시인가?' '확장이 반드시 발전을 의미하는가'라는 의문을 던졌다.

◇그들은 충분히 행복할까 = 앞으로 두 개의 '돈 안되는 강의'가 더 남아 있다. 유장근·이혜숙 교수의 강의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적 다양성을 안다고 해서 내 소득이 올라갈 리 없고, 여성과 젠더 정체성을 깨닫는다고 해서 그걸 돈 버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5만 원의 수강료를 낸 30여 명의 주부·공무원·회사원·인쇄업자·시간강사·대학원생·어린이집 원장, 그리고 해군 군무원과 신문기자 등 수강생들은 돈 보다 더 비싼 '황금같은 시간'을 투자해 강의를 듣고 있다.

강의 후 뒤풀이 술자리에서 함께 했던 한 여성 수강생은 이렇게 말했다.

"돈 되는 지식만이 내 삶을 윤택하게 해줄 것이라던 관념을 깬 것만 해도 5만 원과 시간을 투자한 이상의 가치를 얻은 것 같아요. 진정한 앎이라는 게 돈보다 훨씬 큰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기자 역시 그랬다. 이 강의를 들으면서 적어도 이명박 대통령이나 이건희 전 삼성 회장보다는 내가 훨씬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깨달았으니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황철곤 마산시장이나 마산시의원들, 그리고 지역에서 힘깨나 쓴다는 각종 기관단체장들과 시민사회단체 대표와 간부들이 이런 강의를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이 정도 지식쯤은 다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지금의 삶이 충분히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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