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어린이날 맞춰 소개하는 어린이책 세 권

김훤주 2009. 5. 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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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어요집안과 이웃의 이런저런 어린이에게 줄 선물을 장만하려고 책방을 기웃거릴 어른들도 좀 늘어나겠지요. '첫 경험'을 다룬 어린이책 세 권을 골라봤습니다.

사람은 자라면서 어버이의 품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때로는 조금씩 때로는 한꺼번에 벗어나게 된답니다. 새로운 관계를 이루고 세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싹틔워 주는 경험들을 통해서…….

◇<감추고 싶은 첫 사랑의 비밀 일기>

단점이 있다면 배경이 좀 귀족스러운 편이라는 사실입니다. 주인공 강은이는 아버지가 대학교수고 그 첫 사랑은 합창단에서 여물어 가고 헤어짐은 캐나다 이주로 현실화됩니다. 그러나 심리 묘사, 공간 설정, 상황 전개 등은 뛰어납니다.

초등학교 5학년 남자 강은이, 같은 학년 여자 미리, 한 해 어린 여자 지인이. “엄마가 꽃다발을 미리에게 내미는 순간, 나는 그 꽃다발을 빼앗아 분홍 리본 소녀에게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이 먼 강은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 뒷줄에 앉은 지인이를 바라보았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지인이의 모습은 정말 천사와도 같았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태어나서 본 그 어떤 모습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기다리는 일은 정말 지루했습니다. 세 시간을 넘게 기다렸을 때, 오후 4시 반쯤에 학원 가방을 들고 종종 걸음을 옮기는 지인이가 보였습니다. 갑자기 내 심장의 박동 소리가 빨라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지인이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지 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 때, 지인이가 다시 나왔습니다. 지인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내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나 역시 미리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궁금했습니다. ‘나한테 관심없냐고? 내 생일 파티에 초대했는데, 하나도 즐겁지 않은 것 같아서 묻는 거야.’ 나는 오직 지인이뿐이야. 나는 영원히 지인이만을 사랑할 거라고.
 

내 마음 속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다르게 표현해서 말했습니다. ‘너랑 얘기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기는 해. 그런데 떨리지는 않아.’ 미리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잠시 슬픈 표정을 짓더니 뒤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오빠의 마음도 알고 있었어. 연습하러 갈 때마다 늘 오빠의 눈길이 느껴졌거든.’ 나는 지인이에게 내 마음을 들켰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인이와 함께 있는 그 시간이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이 컴컴해서 지인이가 내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날 강은이 일기는 이렇습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20분 정도 갇혀 있었다. 그러나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고장 난 엘리베이터 안은 캄캄한 천국이었다. 지인이가 내 곁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네 손을 한 번만 잡아 보고 싶어.’ 지인이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지인이의 보드라운 손을 꼭 잡았습니다. 지인이의 손등에 그만 내 눈물이 툭 떨어졌습니다. 나는 지인이의 맑은 두 눈을 바라보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달렸습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으면 펑펑 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날을 앞두고 있으니까, 책 사 줄 어른 심정은 아예 생각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글의 완성도 따위만 따져보거나, 아니면 아이들 학과 공부에 도움이 될까 안 될까 이런 저울질을 할테니까요. 어린이 처지에서 좋아하겠다 싶은 녀석을 꼽았습니다.


◇<엄마가 결혼했어요>

사람은 어쨌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아니면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답니다. 자기 앞에서 웃고 자기한테 따뜻하게 마주해 주는 사람을 보면 그이에게는 슬프고 구석진 데라고는 아예 없는 줄 여깁니다. 그러나 세상살이에서 마냥 즐겁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열 살짜리 빌리, 주인공입니다. 아빠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유복자였던 것입니다. 엄마 엘리가 서른여섯 나이에 재혼을 합니다. 상대는 나이가 쉰셋이고 정수리가 벗어진 쿠엔틴. 그이에게는 열여덟 살 먹은 딸 빅토리아가 있습니다.

빌리는 스스로 생각할 때 피해자일 뿐입니다. 엄마한테 배신감을 품고 외톨이가 됐다고 생각하지요. 새 아빠 쿠엔틴은 물론 새 언니 빅토리아도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이니까요. 그래서 일관되게 배려하는 쿠엔틴도 싫습니다. 호의를 갖고 하는 빅토리아의 뽀뽀도 빌리에게는 찐득거릴 뿐입니다.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리암의 놀림이 이어지는 가운데 빌리는 단짝 친구 알치네 집에 입양돼 가는 꿈을 꾸고 이를 실현하려고 집에서 돈을 훔쳐 산 꽃으로 알치의 엄마에게 바치기도 하지요. 물론, 쿠엔틴의 빌리에 대한 배려와 관심도 날로 더해집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적어도 지금 상황이 낯설지는 않게 된 즈음에, 빌리에게 새 언니 빅토리아의 흐느낌, 서럽게 우는 야릇한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 방문이 열렸을 때, “숨 넘어 갈 듯한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내가 바보라서 그래. 그뿐이야.’”

“‘오늘이 바로…….’ ‘8년 전 오늘……,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날이야.’ 언니 엄마가 돌아가셨다니, 미처 몰랐었어. 난 쿠엔틴 아저씨가 이혼한 줄로만 알았어. 게다가 8년 전이면…… 빅토리아 언니가 지금 열여덟 살이니까, 언니가 열 살 때야! 세상에나, 불쌍한 우리 언니.

나는 곁으로 다가가 언니 어깨에 머리를 기댔어. 엄마가 쿠엔틴 아저씨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그렇지만 목에 걸린 묵직한 울음보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바보 같지 않니?’ 언니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어. 나는 가까스로 아니라고 대답했어.”

아픔이나 상실을 자기 말고 상대방도 겪었고 그 기억까지 새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맹자 식으로 말하자면, 측은지심이 발동돼 인(仁)으로 이어집니다. 서로 떨어져 마주보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어깨 맞걸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이가 되는 것이랍니다.

◇<너와 나 사이, 뭐가 문제지?>

색깔과 개성이 서로 다른 동화작가 일곱이 ‘관계’를 글감 삼아 쓴 단편 동화 한 편씩을 써서 모은 책. 요즘 아이들이 겪어봄직한 여러 관계들을 다뤘습니다. 말이 쉬워 관계이지, 세상살이를 하면 할수록 관계가 전체이고 실체임을 절감하시지 않는가요.

관계는 ‘사이’에서 생겨나지요. 다른 무엇이 또다른 무엇을 만날 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사이가 없으면, 다른 무엇을 만나지 않으면 관계도 아예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한살이를 두고 보면,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면서 거듭거듭 관계가 쌓이는 일이랄 수도 있겠습니다.

일곱 동화니까 주인공도 일곱.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에서 찬민이는 방학 때 미국에서 다니러 온 사촌동생 조나단 때문에 문화적 갈등을 겪습니다. ‘나는 물고기 박사, 짱’에서 현희는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짝꿍 종민이를 미워하다 진심을 알게 됩니다.

‘꼬마 침입자, 기동이’에서 성빈이는 얹혀사는 사촌동생이 아주아주 귀찮고, ‘세 친구를 소개합니다’에서 반달이는 가장 좋은 친구는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고민한답니다. ‘잔소리쟁이 아빠’랑 헤어져 있다 갈이 살게 된 지선이는 가출 직전까지 나아가기도 합니다.


‘우리는 외계인’에서 원섭이는 집안 형편이 나빠 복지원에 맡겨져 힘든 와중에 먹는 것만 밝히고 자기만 아는 현이 때문에 더 힘들어하지요. ‘새엄마 미워하기’에서 은수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들어와 미모와 음식 솜씨와 애교로 아빠 혼을 쏙 빼놓았다고 단정합니다.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실마리는 무엇일까요? 살짝 엿보자면, 이해하기 인정하기 존중하기 등이랍니다. 하나로 뭉뚱그리면 무엇이 될까요? 저는 감동하기, 가 되겠지 싶은데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서 말씀이지요. 더 궁금하다면? 이 책을 사서 초교 낮은 학년 아이랑 함께 보시어요.

김훤주
※ <경남도민일보> 4월 30일치 13면 책 소개에 실은 글을 조금 많이 고쳐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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