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아버지와 숙부의 한 풀겠다는 60대의 사연

기록하는 사람 2009. 4. 27. 07:30
반응형
60대 이상의 마산시민 중 '노현섭'이라는 이름을 모른다면 그는 마산토박이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한국노동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서도 그를 모른다면 얼치기일 가능성이 높다.

50~60년대 노동·인권운동가 노현섭

그로 말하자면 노동운동에서 '마산의 바웬사' 같은 인물이었고, 일찌기 혁신정당 운동을 벌인 진보정치인이었으며,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학살 만행을 가장 먼저 폭로하고 전국적인 진상규명 운동을 이끈 인권운동가였다.

노현섭(1920~1992) 씨는 마산시 구산면 안녕마을 출신으로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마산보통상업학교(이후 마산상고를 거쳐 용마고등학교로 바뀜)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그는 한국전쟁 이후 3개 부두노조를 통합한 단일지역노조인 대한노총 자유연맹 마산부두노조를 결성,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60년 전국유족회장 노현섭 씨(왼쪽), 2009년 4월 25일 마산유족회 준비위원장으로 추대된 조카 노치수 씨. @김주완


이와 함께 그는 마산자유연맹 위원장과 전국자유연맹 위원장으로 한국 노동운동을 주도했으며, 노동자 자녀를 위한 마산고등공민학교와 노동병원을 설립·운영하기도 했던 마산노동운동의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다.


그는 6·25 당시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온 친형 노상도 씨를 보도연맹 사건으로 잃었으며, 자신도 트럭에 실려 끌려가던 중 달리던 차에서 뛰어내려 필사의 탈출을 한 끝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전국의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의 첫 기록은 바로 노현섭 씨의 일기장에서 찾을 수 있다.

노현섭 씨의 일기장. @김주완

"60년 5월 24일(화) 구름, 맑음. 상오 11시부터 하오 1시까지 '정부는 6·25 당시의 보련(保聯)관계자의 행방을 알려라!! 만일 죽였다면 그 진상을 공개하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김용국 군과 단 둘이서 침묵의 시위를 온 시내로 하였다. 1600명의 행방불명자의 영혼이 내 가슴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날의 침묵시위와 함께 노현섭 씨는 다음과 같은 대자보를 시내 곳곳에 써 붙이고 유족신고를 받기 시작했다.

"6·25사변 당시 보도연맹 관계자로서 행방불명된 자의 행방과 그의 진상을 알고 관계당국에 진정코저 하오니 유가족께옵서는 좌기에 의하여 연락하여 주시옵기 자이경망하나이다. 임시연락사무소 마산시 중앙동 1가 1번지(마산자유노조사무실내)…노현섭 근고."

6월 12일 마산상공회의소 회의실에는 소복을 입은 여인네들과 노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두들 6·25때 남편이나 아들·형제를 보도연맹사건으로 잃은 후 제삿날은 물론 생사여부도 모르고 지내온 유가족들이었다. 이날 노현섭씨의 일기는 "장내는 울음의 바다였다"고 전하고 있다.

노현섭·김용국·한범석·이병기 등의 주도로 결성된 이날 마산지구양민학살유가족회는 △학살된 자의 법적조치 및 호적정리 △학살관계자의 사법처리 △유족에 대한 국가의 보호조치 △유골발굴 및 위령비 건립 등 4개항을 결의했다.

1960년 6월 12일 마산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열린 마산지구양민학살유족회 결성식.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노현섭 씨. @김주완

49년이 지나 2009년 4월 25일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열린 마산유족회 재건을 위한 준비위원회.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노현섭 씨의 조카 노치수 씨. @김주완


유족회는 8월 27일 마산역 광장에서 소복을 입은 1000여 명의 유족이 모인 가운데 대대적인 합동위령제를 열었다.


노현섭 씨는 이어 10월 20일 서울 종로구에서 열린 전국유족회 창립총회에서도 회장으로 선출됐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좌절된 진상규명운동

전국유족회는 민간인학살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특별법 제정'을 공식 요구사항으로 내걸고 활발한 활동에 들어가게 되지만, 이듬해 5·16쿠데타로 모든 핵심간부가 혁명재판에 회부되고 증거자료는 모두 압수되고 말았다.

노현섭 씨의 일기장은 마산유족회 결성식 장면에 대해 "장내는 울음바다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주완


박정희 쿠데타정권은 이들 유족회 간부들에게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용공죄를 씌워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5년 등 중형에 처했다. 이 일로 민간인학살 문제는 다시 수십 년간 침묵을 강요당했다.

48년 동안 단절된 역사가 이어진다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2009년 4월 25일, 마산시 양덕동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 노현섭 씨의 조카 노치수 씨를 비롯한 유족 14명이 모였다. 노치수 씨는 당시 학살된 노상도 씨의 아들이다. 이들 유족은 '마산지구 민간인학살 유족회'를 재건하기로 결의하고, 만장일치로 노치수 씨를 준비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노치수 위원장은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한을 풀고, 그분들이 못다한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48년 전에 끊어졌던 역사가 다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은 경남도민일보 27일자 1면에 보도된 마산유족회 재건 기사.

민간인학살 마산유족회 48년만에 재창립

1961년 박정희에 의해 강제해산된 후 48년만에 마산유족회가 재창립됐다. @김주완


1961년 박정희 쿠데타정권에 의해 강제해산됐던 마산 민간인학살 유족회가 48년만에 재창립됐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군과 경찰에 의해 마산 원전 앞바다에서 학살·수장됐던 국민보도연맹원 및 마산형무소 재소자 유족 14명은 지난 25일 오후 1시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회의를 열고, '마산지구 민간인학살 유족회 준비위원회'를 정식 출범시켰다.

유족들은 이날 회의에서 48년 전 쿠데타정권에 의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 후 숨진 노현섭 마산유족회장·전국유족회장의 조카이자, 희생자인 노상도 씨의 아들 노치수 씨를 준비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유족회(준)는 이날 첫 회의에서 가입 범위를 △보도연맹 및 마산형무소 재소자 학살 희생자의 유족으로 하되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확정 여부에 관계없이 미신청인도 포함하기로 결의했다. 다만 군경에 의한 학살이 아닌 미군에 의한 학살은 사건유형이 달라 제외하기로 했다.

유족회(준)는 또 1960년 8월 이후 중단된 합동위령제를 오는 10월 다시 개최하기로 했으며, 아직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한 규명활동과 함께 전국 유족회 및 민간인학살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 등 관련단체와 연대해 '배·보상 특별법' 제정운동과 집단소송 등을 병행해나가기로 했다.

노치수 준비위원장은 "학살이 자행된 지 60년, 유족회가 강제해산된 지 5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진상규명의 길은 멀기만 하다"면서 "여전히 공포에 짓눌려 있는 유족들이 피해의식을 벗고 적극적으로 유족회에 참여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역사 기록의 차원에서 이날 참석자들의 이름을 남긴다.

노치수, 권영철, 나석기, 배기현, 황양순, 김도곤, 송시섭, 송수섭, 김재한, 김주완(경남도민일보), 배성무(마산진보연합 집행위원장), 그 외 동행자 3명.
-준비위원장 노치수(010-3866-6810), 총무 배기현(010-3008-3484)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