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엄마 이데올로기'는 엄마만 짓누를까

김훤주 2009. 4. 2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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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문학 단체나 특정 문인을 욕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엄마 이데올로기’, 우리 엄마한테도 강하게 작용하는 ‘엄마 이데올로기’를 한 번 확인해 보려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끌어와 쓰는 문학 작품들도, 무슨 비판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는 일절 없습니다. 사실은 너나없이 우리들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를 성찰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뿐입니다.

경남의 한 문학단체가 ‘시와 어머니’를 주제로 시화전을 열었습니다. 여기 출품된 시편을 한 번 보겠습니다. 여기 작품들을 읽으면서 공감이 됐다면, 어느 누구도 ‘엄마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어머님들은 왜 살코기는 자식들 먹이고 뼈다귀와 머리만 잡수셨을까? 당신은 먹고 싶어도 자식들이 우선이고, 새끼들을 조금 더 먹이기 위해서 하신 모성애의 본능을 하는 뼈저리게 생각한다.(수필 ‘코다리 정식’ 가운데)

초저녁 하늘에 뜬
개밥바라기를 바라보는 내게
자, 맛보아라.
두고두고 먹어도 변하지 않는 사랑 한 솥이다
발라도 먹고 찍어도 먹고
잼처럼 진득하니 살아라.
살다보면 우리네 삶도 달콤해지지 않겠느냐.('사랑가')

한평생 온몸으로 칼을 받으면서도
제 몸에 난 칼자국보다
모두 나 때문에 칼을 맞는다고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부뚜막에 올라 우는 어머니
아주 속 깊은 나무 한 토막.('도마')

묵은지 한 점 된장찌개에 배인 오랜 손맛이
수저를 적시고 내 밥그릇을 훔쳐갑니다
다 자라서도 엄마 가슴 파고들다 혼이 난
잘못된 기억 저 켠에서 어느 날 세상의 그리움
밖으로 숨어버린 어머니를 생각합니다.('어머니의 빈자리')

산비탈 삼백 평 밭 木花가 지고 갈색 가지 끝 열매가 삼킨 하얀 솜 다발을 끄집어낸 내 어머니는 겨울 내내 물레질로 실을 뽑아 무명을 짰습니다.
그리고 소년인 나는 베틀 앞에 앉아 겨울밤이 새도록 노래하는 어머니 곁에서 열다섯 살까지 따라 부르지 못하는 언어들을 귓가에 흘렸습니다

나의 언어에 슬픈 좀이 슬게 된 건 그때부터였습니다.('목화송木花頌')

죄다 어머니의 헌신을 찬양하는 내용들입니다. 어머니는 강하다, 자식사랑은 절대적이다, 모성애는 위대하다 따위 ‘엄마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들입니다. 어머니의 고달픈 처지에 대한 아픔이 조금이나마 느껴지는 것은 ‘도마’와 ‘목화송’ 정도뿐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이 같은 고정관념은 어머니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아마 아버지가 만들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이런 고정관념(=이데올로기)의 피해자입니다. 자기 희생과 헌신을 바탕으로 삼아 식구들에게 무한하게 사랑을 베풀고 봉사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붙박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야 편하거든요. 그래야 아버지도 편하고 자식도 편합니다. 또 하나, 이렇게 어머니 노릇은 이래야 한다고 만들어 버리면 어머니가 그렇게 하지 않거나 하지 못할 때는 죄인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꼼짝 못하게, 무엇보다 강력한 관념의 사슬로 묶어 버리는 셈입니다.


제게 ‘엄마 이데올로기’를 생각해 보게 만든 책이 있습니다. <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입니다. 자기 자랄 때는 엄마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가,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고 나서 생각해 보게 됐다는 안미선이라는 사람이 썼습니다.

책 42~43쪽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띄어쓰기만 새로 했습니다. “만만한 게 엄마였다. 아기가 아파도 엄마 탓, 집안이 안 되도 엄마 탓, 밖에서 안 풀려도 엄마 탓, 동네북처럼 엄마한테 화풀이를 하고 엄마한테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이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엄마는 도대체 날 때부터 엄마인지, 아기 낳고 엄마 되면 당연히 이거도 해야 하고 저거도 할 줄 알아야 하고, 우리 엄마처럼 해야 하고 옆집 엄마처럼 해야 하고, 엄마표가 딱 붙어버리는데 이걸 떼지도 못하고 어떻게든 감당하려고 동분서주 버둥버둥 생고생을 한다.

엄마란 것은 모름지기 가족 위해 몸뚱이 헌신하고 자기 위해선 한푼 한 시간 쓰지 못하고 죽자사자 자식 성공이 내 성공이요 가문의 영광이 내 영광이라. 그러니 그 엄마 노릇을 누가 완전히 해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제 죄책감에 빠져든다.”

곧바로 이어서, 엄마라는 여자가 식구들에게 당당해지지 못하는 까닭도 붙였습니다. “뼈 빠지게 일해도 살림 타박 한소리에 어째 비실비실 쪽을 못 쓰고 자식 하나 안 되면 가족 눈총 한몸에 받고 뒤돌아서서 ‘그래 내 잘못이야, 내 잘못이야’ 제 가슴 탕탕 치는 것이다. 이게 대대로 내려오는 그놈의 여자 노릇이다.

머리는 당당하려 해도 몸이 먼저 굽어지고 누가 나를 욕하면 대거리 전에 뭐를 잘못했나 두리번대기부터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살림 못한다고 엄마 노릇 못한다고 남편 무시한다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매를 맞고도 얼른 맞서거나 뛰쳐나가지 못한다.

매를 맞지 않는 엄마들도 항상 가족에게 자기 삶을 얻어맞고 산다. 가족은 엄마의 무임금 무인정 노동에 기생하면서 편안히 쉬고 각자의 삶을 꾸려간다. 엄마의 자존심은 엄마 사랑해, 여보 사랑해, 당신뿐이야, 엄마뿐이야, 그 말 한마디가 쥐락펴락하는데, 여보 소리도 엄마 소리로 들렸다가 그나마 그 소리도 아예 안 들리면 여보도 엄마도 아닌 여자들은 가라앉는다.”


자식을 낳고 나서 알게 된 바도 함께 적었습니다. ‘엄마는 없다.’는 선언으로 들립니다. 79쪽입니다. “막상 엄마가 되고 보니 좋은 엄마란 것은 가랑이 찢어지도록 저 멀리 있다. 욱하면 애를 때리고 싶고 휭 하니 나가버리고 싶고, 그냥 다 엎고 싶어도 꾹 참고 애면글면하면서 나는 어렴풋이 이해했다.

엄마라는 이름 속에 숨겨진 들끓는 감정을, 숨죽이는 욕망과 이름 없는 고통을, 불합리한 현실 속에서 감내해야 되는 여자들의 좁은 선택을. 우리 모두가 바라는 완벽하고 착한 엄마는 아무데도 없다는 것을 비로소 하나둘씩 알게 된다.”

그러면서 자기 엄마를 떠올리지요. 152~153쪽에 나옵니다. “음식을 차리고 옷을 빨고 집을 닦고 쓸고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친지를 챙기고 매일 장을 보면서, 어머니는 여느 주부들처럼 가족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집을 가꾸려고 전쟁 같은 나날을 보냈다.

가사 노동의 가치가 매월 100만원이라느니 200만 원이라느니, 한 해 100조대의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느니 하고 신문에 나오지만 아무도 지불하지는 않는다. 돈으로 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일이 아닌 것, 누구나 할 수 있거나 누가 해도 하나마나한 노동이 되고 만다. 숭고한 사랑과 자발성의 이름 아래 최소한의 인정과 사랑을 대가로 그 노동은 공급된다.”

한 사람이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면서 뼈골이 빠지게 고생을 하게 되는 구조랄까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저는 제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을 크게 다행으로 여깁니다. 더 이상 모성애가 어떻고 저떻고 따위 언사를 하지 않게 된 것도 크게 다행으로 여깁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저는 죽을 때까지도 제 어머니(벌써 돌아가셨지만)의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을 것입니다꼼짝없이 투병 중인 제 아내가 마찬가지 ‘엄마 이데올로기’에 시달렸었으리라는 짐작도 전혀 못했고, 우리 딸에게 ‘나중에 애 낳거든 좋은 엄마 되지 말고 나쁜 엄마 돼라.’고 일러줘야지 하는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김훤주

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 - 10점
안미선 지음, 장차현실 그림/철수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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