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기자에겐 돈봉투를 줘야 한다는 할머니

기록하는 사람 2009. 3. 26. 17:50
반응형

기자 생활을 하다보면 참 안타까운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들 중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문제는 누가 봐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상해가면서까지 집착하는 겁니다.

대개 그런 분 중에는 할머니가 많은데요, 관련 행정관청이나 경찰, 검찰, 법원은 물론 총리실과 청와대까지 몇 번씩이나 거친 후, 관련 서류를 보따리에 잔뜩 싼 채 신문사로 찾아옵니다.

갖고 오신 서류를 하나 하나 다 읽어보고, 몇 시간에 걸쳐 할머니의 호소를 들어보지만, 소송에서도 모두 패소한 사건에 대해 기자로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 아들과 며느리, 딸도 나서지 않습니다. 그들조차 자기 어머니의 주장에 동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의 요구에 의해 찾아간 측량현장.


물론 기자는 법에 따라 판단을 하는 직업이 아닙니다. 법 이전에 상식이라는 게 있고, 인류의 보편적 정의와 가치가 있습니다. 기자의 판단 기준은 거기에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소송에서 모두 졌다고 해도 일단 할머니의 말을 모두 들어봅니다.

그러나 상식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는데다, 그걸 할머니는 전혀 납득하지 않으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결국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하면 할머니는 "기자도, 군청도, 지적공사도, 국토해양부도, 검사도, 판사도 모두 한통속"이라며 불만을 토로합니다. 기자는 그쯤에서 손을 떼 버리면 그만이지만, 승복하지 못하고 계속 이 일에 집착해 몸과 마음을 상해갈 할머니를 생각하면 안쓰럽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만난 할머니도 그랬습니다. 할머니가 소유해온 밭의 면적을 둘러싼 분쟁이었는데요, 할머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면적보다 지적도의 면적이 작다며 끊임없이 민원과 소송을 제기했으나, 모두 패소했습니다.

오늘은 줄자까지 동원하여 측량을 했으나 결과는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또다시 저를 찾아와 "다시 측량을 해야 하는데, 기자가 취재를 해주면 지적공사 공무원들이 '장난'을 치지 못한다"는 겁니다. 심지어 할머니는 그 부탁을 하면서 저에게 돈봉투까지 내밀었습니다. "돈을 줘야 기자들이 잘해준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면서 말입니다.

돈봉투는 짐짓 화를 내며 꺼내지도 못하게 했지만, 할머니의 소원이나마 들어주는 셈 치고 오늘 오전 함께 측량 현장에 가봤습니다. 지적공사 직원들은 지난 몇 년간 할머니의 요구에 따라 이 밭에 대한 측량만 열 번 넘게 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할머니의 소원대로 측량기 외에 줄자를 가지고 재보기도 했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지적공사 직원들의 측량결과에 납득하는 모습을 보이자, 할머니는 저에게 막 욕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기자도 한통속이라는 겁니다.

물론 할머니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수십 년간 자기 땅인 줄 알고 경작해온 밭이었는데, 알고보니 지적도상으로는 1/3 이상은 남의 땅이었다는 걸 어떻게 할머니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20년 가까운 기자 생활동안 이 할머니 같은 분을 약 열 번 이상은 만나봤을 겁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대개 그 분들은 기자에게 돈봉투를 주려고 합니다. '기자에겐 돈을 줘야 잘 해준다'는 그 분들의 생각은 오랜 세월 기자들이 스스로 만든 원죄일 겁니다. 참 씁쓸한 하루였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