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김주열 살해 유기 원흉은 친일헌병 박종표였다

기록하는 사람 2009. 3. 19.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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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열사 김주열을 아시나요? 김주열은 전북 남원 출신으로 1960년 경남 마산의 마산상고에 진학했다가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다 숨진 3·15의 화신이며 4·19의 횃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18일) 블로거 정운현 선배가 '친일헌병들은 애국지사를 어떻게 '고문'했나'라는 글을 올렸는데, 거기에 등장한 일제 헌병보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신상묵과 박종표였던 것입니다.

신상묵이야 신기남 전 의원의 부친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자이지만, 박종표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박종표는 3·15의거와 김주열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들로서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원흉입니다.

그는 바로 열 여섯 살의 김주열 학생에게 직격최루탄을 발사해 눈을 관통하게 함으로써 살해했으며,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숨진 김주열 군의 시신에 돌을 매달아 마산 앞바다에 수장시킨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이었던 것입니다.

맨 오른쪽의 인물이 박종표입니다. /사진 3.15의거기념사업회

일제 강점기 때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 구금하고 악랄하게 고문하던 박종표가 어떻게 처벌받지 않고 풀려났는지에 대해서는 정운현 선배가 쓴 후속 기사 '친일헌병 박종표가 반민특위서 '무죄'받은 까닭'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가 이후 대한민국 경찰이 되어 시민들을 고문, 학살하고, 김주열 시신을 유기한 박종표가 일제 때 헌병 아라이(新井)였다는 것은 고은 시인이 '만인보'에서도 쓴 바가 있습니다. 향토사학자 홍중조 씨가 쓴 <3·15의거>(1992)에도 김주열을 학살, 유기한 박종표가 아라이였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고, 저 또한 그동안 썼던 적지 않은 글에서 박종표의 죄상을 기록한 바 있습니다.

박종표가 사형 구형을 받을 당시 동아일보 보도.

박종표는 이후 혁명재판소에서 최루탄을 발사하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유기한 사실을 자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 다시 시신 유기만 인정하고 최루탄 발사는 부인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됩니다.

그는 김주열 열사의 시신 유기 과정에 대해 '3월 15일 밤 10시쯤 교통주임으로부터 최루탄이 눈에 박힌 괴이한 형상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고 손석래 마산경찰서장에게 보고하자, 서장이 '적당히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자 지프차를 타고 현장에 도착, 시체를 담아 싣고 일단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에서 시체를 유기하기로 마음먹은 후 다시 월남동 마산세관 앞 해변가로 시체를 가져가 순경 한대진과 지프차 운전수의 조력으로 시체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졌다'고 자백합니다.



그러나 김주열 군의 시체는 그로부터 27일 후인 4월 11일 오전 10시 중앙부두 앞바다에 참혹한 모습으로 주먹을 꽉 진 채 떠올랐고,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이를 촬영함으로써 AP통신을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됩니다.

바로 이 김주열의 시신이 도화선이 되어 다시 마산시민들이 총궐기하게 되고, 시위는 서울로 확산돼 마침내 4월 19일 이승만이 물러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은 당시 경찰이나 최근 발생한 용산 철거민 참사 때의 경찰의 횡포가 여전히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시 경찰은 김주열 군의 시신을 아무도 몰래 병원에서 빼내 야음을 틈타 고향 남원으로 보내버립니다. 주열의 싸늘한 시체를 실은 앰뷸런스가 남원 고향집에 도착하자 경찰은 김군의 모친 권찬주 여사에게 시체 인수증의 서명을 요구합니다.


거의 실신상태에 있던 권 여사는 어금니를 깨문 채 벌떡 일어나 싸늘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시체를 못받겠으니 부정선거로 당선된 이기붕이한테 갖다주시오!"

일제 때 동포를 무자비하게 고문하던 일본 헌병보가 대한민국 경찰이 되어 시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어린 학생의 시신까지 유기한 박종표의 모습, 이것이 아직 역사의 정의를 세우지 못한 대한민국의 자화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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