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빙 필자의 글/하태영, 하마의 下品

독일통일 20년, 우리는 뭘 배워야 하나?

기록하는 사람 2009. 3. 5.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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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 법과대학 하태영 교수가 최근 독일에 다녀왔다. 그는 올해로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독일 통일을 교훈으로 우리의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그 현장을 가다'라는 긴 글을 써보내왔다. 글이 길어 2회로 나눠 연재한다. 이 글은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그 현장을 가다'에 이어지는 글이다.(김주완 주)

한반도 통일, 어디까지 왔나

독일은 1970년 정상회담 이후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까지 20년이 걸렸다. 지금의 한반도 분위기는 독일과 비교해 보면, 통일을 위한 초기단계이고, 상황은 냉각되어 있다.

북한의 핵문제, 김정일 와병설, 미국 오바마 대통령 당선, 북한의 군사 행동 위협, 북한 권력 승계 문제, 대북 특사 등 한반도의 정치 및 외교적 상황은 어느 때 보다도 복잡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2009년 2월 베를린 포츠담 거리에서 관광객들이 베를린 장벽 붕괴를 기념하는 사진을 찍고 있다. 2009년은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 정부는 미국과 일본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어야 하고, 또한 중국과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통일 이후의 안보환경은 이들 주변국가와 깊은 연대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주장하면서, 한국만의 독자적인 길은 없다고 주변 국가들을 안심시켜야 주어야 한다. 국제기구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최적의 통일 환경을 기다려야 한다.

독일 아데나워장학재단의 게에스(Gees)씨를 2009년 2월 9일 만났다. 그는 한반도의 최근 긴장 관계를 이렇게 분석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수행할 경제적 여력이 없다. 미국에는 이란, 아프카니스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 등이 산적해 있다. 여기에 한국의 문제까지 확대된다면, 미국의 외교력은 포화상태가 될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북한은 이점을 노리고 '벼랑 끝 전술'(위협 전술)을 구사할 것이다. 결국 미국과 한국은 인도적 차원에서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으로 생색을 내면서 현 상태를 방치할 것이다. 불쌍한 것은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의 생활이다."

그의 분석을 듣고서 마음이 너무 찹찹했다.

2009년 2월 7일 독일 하노버 행 기차 안에서 만난 프란치스카 포르쉬(Franziska Porsch, 1989년 생, 할레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1학년)는 건물과 도로 등 사회적 인프라는 상당히 좋아졌지만, 동서독인들의 마음의 벽은 여전히 붕괴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우리 세대가 사회의 중심이 될 때 까지 최소한 20년은 기다려야 한다."


독일의 통일과정, 장애물 그리고 외교비사(外交秘史)

독일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통일까지 국내적으로 많은 문제를 헤쳐 왔지만, 국외적으로 통일을 위해 반드시 넘어가야 할 세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첫째 통일 후 독일의 나토 가입문제, 둘째 독일군 병력 수, 셋째 동독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장래문제였다.

1990년 미국과 소련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련은 통일 독일의 나토 가입을 거부하면서 '독일의 중립국'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미군의 유럽 주둔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갈 것인가? 독일은 고민했다.

그러나 독일의 입장은 분명했다. "독일은 20세기에 두 번의 전쟁을 경험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이면 독일과 유럽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유럽에서의 미군철수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독일은 소련과의 협상에서 최종 문서에 "독일이 통일 후 자유로운 동맹가입 선택권을 가진다는 점을 분명히 명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나토 가입을 의미했다. 고르바초프는 작은 조건을 달았지만 결국 동의했다. 독일은 '통일 후 조건 없는 나토 가입'을 얻어냈다. 미국과 독일, 그리고 서방세계의 합작품이었다.

2009년 2월 독일 베를린 연방의회 건물. 독일 국기와 유럽연합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연방의회는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지로 인기가 높다.


다음으로 통일 후 독일군 병력 수도 문제였다. 독일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겐셔는 '통일 독일의 병력이 35만이 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소련이 어떻게 나올 것이냐" 하는 점이었다. "독일이 35만이라는 숫자를 갖고 협상에 들어가면 종국에 가선 28만으로 줄어들 것이다. 40만 명으로 협상을 시작해야 된다"고 독일 정부는 생각했다. 이 문제는 이미 런던 정상회담에서 조율된 사항이었다. 이것도 독일 정부안대로 관철되었다.

마지막 남은 외교적 장애물은 독일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장래문제였다. 철수시기와 철수비용이 쟁점이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5~6년 안에 철수를 끝내자"고 제안했다. 독일은 수정하여 '3-4년 철수안'을 제안했다. 독일은 귀향하는 소련군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협조하기로 하고, 별도 협정을 통해 "동독의 서독 마르크화 도입 후 주둔 소련군에게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함께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1990년 10월 9일. 독일 정부는 "동독 지역 소련군의 한시적 주둔과 철수비용으로 약 120억 마르크(약 7조 2000억 원)를 지원하겠다"고 서명했고, 독일 정부의 '3~4년 철수안'으로 합의했다. 독일의 경제력이 모스크바를 녹여버린 것이다. 마지막 흥정이었다.

2009년 2월 6일 독일 할레시 탈리아 서점에서 열린 독일 전 외무부장관 겐셔의 사인회 장면. 그의 신작 제목은 "독일의 기회"(Die Chance der Deutschen)이다. 이 책에는 18년 외무부장관의 경험들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그는 독일 통일의 '어머니'라고 불리며, 동서독 국민들에게 모두 깊은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다. 구 동독 할레(Halle)는 그의 고향이다.

독일 통일, 한국에 어떤 교훈을 남겼나?

한반도의 급변하는 기류를 보면서 '독일의 통일과정, 장애물, 그리고 독일의 외교비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국 통일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주변국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비정한 외교 전쟁이라고 할까?

2(남한, 북한)+2(미국, 중국). 여기에 2(일본과 러시아)가 개입하고 있다. 일본은 6자 회담을 통해 새로운 역할을 도모하고 있다. 러시아는 철도연결을 내세워 한반도에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고 있다. 중국은 러시아에 대해 견제심리를 노골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미국은 이 틈새에서 북한과의 대화 창구를 열어두고 있다. 이해관계에 얽혀있는 주변국을 설득하며 우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외교전쟁은 역사적 심판대에 있다.

남한과 북한, 그리고 국민 모두는 지금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의 도전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 우리들은 태풍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독일 통일이 한국에 남긴 교훈은 세 가지이다.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도 독일의 경우와 같이 세 가지 장애물이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분단국가가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따라서 우리의 외교는 독일의 외교비사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인지 철저하게 분석해야 한다.

첫째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장래 문제와 이와 관련한 주변국들의 입장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 세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둘째 통일 이후 우리 군의 지위 문제를 분명하게 정립해야 한다.

셋째 통일 이후 우리 군의 병력 수에 관해 정확한 진단 후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 이 세 가지 문제는 주변국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결국 이것이 한국 통일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글쓴이 : 하태영(동아대 법과대학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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