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형무소 재소자 학살, 미군도 승인했다

기록하는 사람 2009. 3. 3.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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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직후 경남지역(부산 포함)에서 벌어진 민간인학살사건의 실질적인 지휘자는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김종원 계엄사령관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당시 미 군사고문단이 형무소 재소자 학살을 사전에 승인했거나 최소한 묵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당시 마산지구 계엄사령부는 재소자들을 요식적인 군법회의에 회부해 처형한 후, 문서를 조작해 계엄사령관의 승인을 받은 것처럼 조작한 사실도 드러났다.

심지어 부산·마산·진주형무소에서는 잡아들인 보도연맹원들을 구금할 공간이 부족하자, 강도·절도 등 일반사범들을 아예 석방시켜버린 사실도 밝혀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는 이같은 내용을 담은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결정문과 보고서를 유족들에게 전달했다.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에 대한 진실위 보고서.


◇일반사범 무더기 가석방
= 이 보고서에 따르면 마산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시국사범을 제외한 일반사범을 무더기로 가석방했다. 당시 <재소자인명부>에 따르면 일반사범들은 형기가 남았음에도 7월 5일~10일, 7월 31일~8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가석방이 진행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수용자신분장>은 8월 2일 하루에만 계엄사령부 명령에 의해 106명의 재소자들이 대거 석방된 것으로 돼 있다. 가석방된 재소자들의 죄명은 절도·주거침입·강도·업무횡령·과실치사 등이었고, 형기는 징역 8월~7년 사이의 단·중기사범이었다.


부산형무소에서도 전쟁 발발 직후 2개월 동안 강도와 절도 등 일반사범 767명이 '가석방' 또는 '집행정지'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특히 8월 2일~6일에는 나흘동안 무려 236명이 집중적으로 가석방됐다.

◇시국사범은 무조건 사형 = 1950년 7월 8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7월 26일 계엄지역에서 군사재판의 수속을 원활히 하기 위한 특별조치형이 발포되자 형무소 재소자들 일부는 미결·기결수에 관계없이 군법회의에 회부돼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된 사실이 '마산지구 계엄사령부 고등군법회의 기록'에 의해 밝혀졌다. 특히 형이 확정된 기결수를 다시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처형한 것은 헌법이 규정한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다.

이처럼 군 당국에 의해 집단처형된 기결수 재소자 중에는 사형수가 전혀 없었다. 이들의 형기는 징역 3년 이하가 대부분이었고, 무기징역 이상은 3명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마산지구 고등군법회의는 1명의 심판관 만으로 변호인도 없이 하루에 159명을 사실심리하여 사형 141명, 무죄 18명으로 판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1950년 9월 1일, 부산형무소 재소자들이 희생 현장으로 끌려가기 직전 트럭에 실려 있는 모습 ❍ 출처 : Picture Post-5086-pub.1950 (by Bert Hardy)


이 재판의 범죄사실에 대한 심사 및 주석에는 구체적인 범죄도 없이 "(피고인들이) 침묵으로서 아무런 의견을 진술초차 요망치 아니하고 끝까지 기소된 범죄사실을 유죄로서 시인함에 해(該) 사실이 국방경비범 32조의 '직접 간접 - 적의 구원'에 해당"된다고 밝히고 있다. 즉 피고인의 침묵을 유죄의 근거로 삼은 어처구니없는 판결기록이 남은 것이다.


◇군법회의 문서 조작 = 진실위는 마산지구 군법회의 문서의 날짜가 조작된 사실도 밝혀냈다. 계엄사령부 법무부장 김종만(육군소령)이 작성한 1950년 8월 20일자 공문 '경계법무내발 제54호'는 실제로 9월 13일 작성됐으나 날짜를 앞당겨 조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른 공문의 연번과 날짜가 맞지 않는 모순이 발생하는데, 이는 먼저 사형 판결을 내려 처형한 뒤, 사후에 요식을 갖추기 위해 문서를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조작된 문서에는 최종 승인명령권자인 계엄사령관 김종원 대령의 서명이 돼 있었다.

◇실질적 책임자 김종원과 미군의 승인 = 경남지역 민간인학살은 육군 정보국 CIC와 헌병대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이들은 계엄사령관 김종원 대령의 지휘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김종원은 당시 미 군사고문단과 협의 또는 승인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경상도지역을 관할하던 제3사단의 미 군사고문단원 에머리치 중령의 비망록에 따르면 김종원 대령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이 부산에 들어올 경우 형무소 재소자 3500명에 대한 학살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미 군사고문단은 UN감시단에 보고하겠다며 만류했으나, '적이 부산 외곽에 이를 경우 감옥문을 열고 기관총으로 사살하도록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에머리치 비망록에서 이후 사태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낙동강 전선의 전황이 악화되던 7월 하순부터 형무소 재소자 학살이 시작됐다. 김종원은 학살이 진행된 7월 하순부터 9월말까지 경남지구 위수사령관, 부산지구 헌병대장,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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