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민간인학살 유족 황점순 할머니의 눈물

기록하는 사람 2009. 3. 2.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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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과 진주·부산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등 수천여 명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된 사실을 국가기관이 공식 인정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공식 보도자료를 발표한 것은 오늘(2일) 오전이지만, 사실 저는 유족을 통해 미리 결정통지문을 입수해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 발표가 나온 날, 제가 아는 희생자 유족 가운데 가장 피해가 컸을 뿐 아니라 그날 이후 60년 가까이 핏줄 한 명 없이 평생 홀몸으로 살아온 황점순 할머니댁을 구자환 기자와 함께 찾았습니다. 뚜렷한 취재계획은 없이 그냥 할머니를 뵙고 싶었습니다.

황점순(83) 할머니는 제가 1999년 10월, 처음으로 마산 곡안리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을 보도할 때 만난 후 지금까지 10년간 교류해온 분입니다.

할머니가 60여년을 혼자 살아오신 집입니다. 청소를 참 깔끔히 해놓고 사십니다.


할머니는 1950년 8월 남편 이용순(당시 23세)을 보도연맹사건으로 잃었을 뿐 아니라, 본인도 미군의 총탄에 왼쪽 대퇴부와 엉덩이, 가슴을 맞아 기사회생한 분입니다. 시어머니와 시조부도 같은 날 미군의 총탄에 희생됐으며, 유일한 혈육이었던 한 살 난 젖먹이 아들도 그 현장에서 잃었습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오래된 일을 조사관들이 일일이 찾아 확인해줘서 너무 고맙다"면서 "한 푼의 보상금이라도 나오면 밥이라도 사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죄가 있어 죽은 게 아니고, 억울하게 죽은 거라는 걸 밝혀준 것만 해도 반분이나마 풀리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저는 차마 '할머니 진실규명은 됐지만, 보상금은 나오지 않아요'라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아직도 걸음이 불편하십니다.


60년 전 그 집에서 혼자 살아오신 할머니는 기초생활보호대상자로 월 24만 원의 생계 및 주거지원금과 8만4000원의 노령연금으로 살아가고 계십니다. 총탄을 맞은 다리가 지금도 쑤셔 걸음도 불편하고, 한맺힌 가슴으로 살아오시다 보니 심장도 좋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도 받고, 매월 심장병 약을 먹고 있지만, 나아지는 기미는 없습니다.

할머니에게 "할 수만 있다면 제일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이제 나이를 먹으니 별로 하고 싶은 것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먹고 싶은 것은 없냐"고 물었습니다. 역시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매일 신약만 먹으니 속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겠고, 한약을 좀 먹어봤으면 좋겠는데, 한약은 안된다고 하데?" 하십니다. 아마도 보약은 의료보호가 안된다는 뜻인 것 같았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할머니가 또 그때 잃은 젖먹이 아들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 때 아이 겨드랑이에 피가 흐르는 걸 보고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총상을 치료한 후 다시 현장에 가봤더니 다른 시체는 있는데 아이 시신만 없어졌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아직도 그 아이가 죽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살아있을 것이라는 실날같은 희망을 잃지 않고 계십니다. 혹시 그때 미군이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아이를 데려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다. 이 말을 하시면서 할머니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렸습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 드리지 못하는 답답한 마음을 품고 할머니와 헤어졌습니다. 조만간 보약이라도 한재 지어 다시 찾아야 겠습니다.


아래는 제가 오늘 신문에 썼던 기사입니다.

마산·진주·부산 수천 명 민간인학살 공식 인정

한국전쟁 발발 직후 마산과 진주·부산에서 수천여 명의 민간인과 형무소 재소자들이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된 사실이 국가기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 위원장 안병욱)는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부산·마산·진주형무소 등에 수감된 재소자와 민간인 최소 3400여 명이 육군본부 정보국 CIC와 헌병대, 경찰, 형무관(교도관)에 의해 불법적으로 희생됐음을 밝혀내고, 그 중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576명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특히 마산과 진주 민간인학살의 경우, 1999년 <경남도민일보>의 발굴보도로 진상규명 요구가 제기된 후 10년만에 국가가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1960년 마산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마산유족회 결성식. 유족회장으로 선출된 노현섭씨의 일기장에는 "장내는 울음바다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진실위는 진실규명 결정과 함께 △국가는 희생자와 유족에게 공식 사과하고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희생자의 위령제 봉행과 위령비 건립을 지원하며 △잘못 기재된 가족관계등록부의 정정 △정부 공식 간행물과 향토사에 이 사건을 추가할 것을 권고했다.

진실위는 이번 조사에서 1950년 7월 5일부터 9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국군과 경찰, 형무관들에 의해 마산형무소 재소자와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등 최소한 717명이 인근 산골짜기에서 총살되거나 구산면 원전 앞바다에서 집단수장됐으며, 그들 중 358명의 구체적인 신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명단에는 진전면 곡안리 미군학살사건의 피해자이자 남편을 보도연맹사건으로 잃은 황점순·이귀순씨도 유족으로 포함됐으며, 1960년 마산유족회 노현섭 회장의 형 노상도씨도 희생자로 확정됐다.

진실위는 또한 진주형무소에서도 같은 해 7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최소 1200여 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집단살해됐음을 밝혀내고, 70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이 가운데는 지난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한 산사태로 유골이 드러난 후 경남대 박물관팀에 의해 163구의 유해가 수습된 진전면 여양리 학살사건도 포함됐다. 이밖에도 진주의 경우 명석면 우수리와 관지리, 용산리를 비롯, 문산읍 상문리 등에서 학살 암매장이 이뤄졌다.

또 부산형무소에서도 최소한 1500여 명이 집단살해됐으며, 148명의 신원이 이번 조사에서 확인됐다.

하지만 마산의 경우 형무소를 거치지 않고 군경에 의해 바로 학살된 희생자들은 확인하지 못했으며, 형무소 재소자나 보도연맹원 중에서도 유족이 피해신고 기간을 놓친 희생자들도 이번 명단에서 빠졌다. 이에 따라 누락된 유족들의 민원이 줄을 이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행 법을 개정하지 않는 한 추가신고나 재조사 및 재심의가 쉽지 않아 진통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재소자 가운데 일부 기결수들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헌병대에 인계돼 총살됐으며, 대부분은 육군형사법·국방경비법 등을 위반한 징역 3년 이하의 단기수들로 당시 사형수가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형이 확정된 기결수를 다시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을 언도하고 처형한 것은 헌법이 규정한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위반한 사실상의 집단학살이라고 진실위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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