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테러를 무용담으로 기록한 우익청년운동사

기록하는 사람 2009. 2. 10.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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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너무 엄혹하다. 마치 박정희 시대나 이승만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실제 현 정권은 이승만을 다시 국부(國父)로 추앙하고 그의 분단정부 수립을 '건국'이라 칭하며 반대세력을 싹쓸이하고픈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승만의 친위조직이었던 국민회와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땃벌떼와 백골단, 민중자결단과 같은 반공우익집단들이 '뉴라이트'로 이름만 바꿔 다시 발호하고 있는 것도 그 때를 연상케 한다.

이럴 때일수록 현대사를 되돌아보면서 역사에서 지혜와 교훈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한국 우익집단과 토호세력의 뿌리' 를 약 50회에 걸쳐 추적해보려 한다.

실패한 민중항쟁 10월봉기, 그 후

우익단체의 테러를 무용담처럼 기록한 [건국청년운동사]

앞서도 수차 언급했지만 해방후 경남지역의 현대사에 대한 자료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특히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발간한 도사(道史)나 시사(市史)·군지(郡誌) 등 공식기록에서 해방공간의 역사를 찾는다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이는 아마도 그 당시의 역사가 좌·우익의 대결로 점철됐던 데서 연유한 것 같다. 그것도 단순한 이념대결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테러와 살인의 반복이었으니 기록자들이 쉽게 건드리기 어려운 문제일 법도 하다. 아직도 그때의 가해자와 피해자 또는 그 가족이나 후손들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잘못 건드렸다간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연히 있었던 사실을 은폐한다고 해서 문제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다시는 그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실은 사실대로 기록돼야 한다. 그래서 역사란 무서운 것이며, 역사 속의 악인은 반드시 역사의 단죄를 받는다는 일반적 진리를 정립해야 한다.

어쨌든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경남지역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미국인 학자가 쓴 책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에서부터 1946년 10월봉기에 이르기까지 경남의 역사를 객관적 자료와 함께 기록하고 있는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커밍스, 일월서각, 1986)은 10월봉기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가을봉기의 손실은 엄청났다. 경찰관 200명 이상이 피살되었다. 시위자 및 민간인의 수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1000명은 넘었다.(중략) 봉기의 결과가 가져온 한국 빈농들의 가장 큰 손실은 그들의 이익을 지켜주었던 지방조직들의 붕괴였다. 대부분의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들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남한 전역에 울려 퍼졌다. 좌파 주요기구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죽든지 투옥되었든지, 쫓기고 있든지 혹은 지하로 잠입하였다. 그들의 수많은 지지자들은 정치에서 떠나거나 더욱 급진적으로 되었다. 좌파 전체를 수용했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분쇄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대중적 지지를 상실한 채 보다 극단적이며 포용력이 적은 남조선노동당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브루스커밍스는 또 이 책의 서문에서 10월봉기와 1948년의 '2·7구국투쟁', 여순반란 및 제주 4·3사건 등을 일종의 내전으로 보면서 이것이 전쟁으로 표면화된 것이 한국전쟁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의 말대로 10월봉기는 좌익을 수세국면으로 몰아넣는 한편 그동안 열세에 있던 우익단체를 공세로 반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마산의 경우 10월봉기 때 한명의 사망자와 여러명의 부상자를 낸 우익단체들은 봉기가 진압된 직후부터 조직을 정비, 대대적인 좌익소탕에 나서게 된다. 이런 우익단체의 '활약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 우익 청년단체에서 펴낸 <대한민국 건국청년운동사>(건국청년운동협의회, 1989)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이 책은 당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수많은 우익청년단체에 대한 자료를 1800여 쪽에 걸쳐 무용담처럼 수록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나름대로 10월봉기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들조차도 이 사건을 '좌익의 선동'만으로 파악한 미군 측의 입장과는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원인은 물론 좌익의 정치적 책동에 있지만 그것보다도 크게 일반대중이 가담해 확산된 것은 △식량사정이 악화돼 배급제로는 국민이 살수 없었고 △미 군정이 일제시 잔악한 경찰을 재등용함으로써 국민들의 불만이 증대했으며 △친일파 및 일제협조자들을 미 군정의 요직에 등용하는 등 결국 미 군정의 실정에 의한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마산지역 우익단체의 대표적 인물은 주로 손문기·민영학(국민회), 유석형·손상진(광복청년단·대동청년단), 문삼찬, 조철제, 노병덕·구혜숙(민족청년단), 이인호(서북청년단) 등이다. 특히 민영학이 대표로 있던 국민회는 10월봉기 직후 좌익에 대한 복수를 위해 서울의 중앙타격대에 지원요청을 했다는 기록도 눈에 띈다.

이 책은 "지방에 인민위원회와 민전·민청·전평 등 온갖 좌익들의 간판이 나붙고 있었지만 이를 제거한 것은 미 군정법령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 오로지 우익단체들이 혈투 끝에 박살내고 좌익들을 지하로 잠입케 했다"면서 "각 지방에서 중앙에 좌익 평정요청을 했으며, 특히 경남지방에서는 10월폭동으로 우익계가 큰 피해를 당한 후였는데 급한 대로 (중앙타격대가) 마산 등지로 행각하면서 지원을 했다"고 적고 있다.

이에 따라 "지방좌익들은 서울에서 왔다는 거한들이 손바닥만한 읍촌을 권총과 국청의 완장을 차고서 누빌 뿐 아니라 좌익사무실을 박살내고 다시 이곳에 나타나는 놈은 끝까지 응징하겠다는 경고 앞에 숨을 죽이고 말았다"며 의기양양해 하고 있다.

함양에서 하준수(남도부) 등을 테러한 사실과 진주 테러사건 등을 의기양양하게 기록해놓고 있는 부분.


이 책은 특히 맘에 들지 않는 언론사를 습격하고 기자들을 폭행했으며, 수많은 좌익인사와 양민들을 살해한 사건까지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이를 모두 혁혁한 전공으로 미화하고 있다. 또 이런 과정에서 발생한 '2·7구국투쟁'에 대해서도 "경남·북지방에서만 8,475명이 체포되고 경찰 6명과 관공리 1명, 좌익인사 5명, 폭도 28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옛 경남매일신문(현 경남신문)이 연재한 사건 30년에도 '마산 2·7폭동'이란 제목으로 비교적 상세히 전하고 있다. 이밖에도 당시 부산에서 발행되던 부산일보와 민주중보·대중신문 등 지역신문에는 수도 헤아릴 수 없는 우익테러와 좌·우익충돌사건이 실려 있다.

이런 와중에 제주에선 4·3사건이 발생, 수만여명이 사망했으며, 이는 곧 여순사건으로 이어진다.

미 군정과 경찰·우익청년단체의 대대적인 좌익소탕을 바탕으로 1948년 8월 단독정부 수립에 성공한 이승만 정권은 산속으로 숨어든 좌익 유격대 토벌작전에 나서는 한편 1949년 10월에는 좌익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 전국 시·군·읍·면 단위로 '보도연맹'이란 걸 만들게 된다. 이른바 전향한 좌익으로 구성된 보도연맹은 전국적으로 조직원이 30만명에 달했다.

이렇게 결성된 보도연맹은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결국 '집단학살'이라는 민족사의 대비극을 낳게 된다. 마산에서도 1681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경남전역에서 드러난 숫자만도 5000여명에 달하는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아직도 많은 유족들에게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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