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언론

기자님들, 설 선물 좀 받으셨습니까?

기록하는 사람 2008. 2. 10.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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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선물과 촌지가 끊이지 않는 이유

“행님아~ 설 됐다 아이가. 뭔 말인지 알제~? 장사 하루 이틀 하나. 선물 처리 잘 해라이~.
아! 맞다! 근주는 잘 모를 수도 있겠다.
근주야!
- 일단 받지 마라.
- 받았으면 돌려줘라. (웬만하면 이 단계에서 끝내라.)
- 이도저도 안 되면 기자회로 들고 와라.”

설을 앞두고 최근 경남도민일보 기자회 이승환 사무국장이 사내 인트라넷에 올린 공지글이다. 위 글에서 거명된 1년차 김근주 기자는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선배~ 일 시켜서 죄송합니다. 1. 무조건 안 받는다고 말 합니다. 2. 상대방이 무조건 집 주소 대라고 합니다. 3. 저는 회사가 내 집이라고 합니다. 4. 담당자는 사장에게 혼난다고 무조건 보냅니다. 5. 승환 선배는 일이 많아집니다. 6. 저는 다행히(?) 차가 없어 손이 무거워서 선물을 들고 올 수가 없습니다. 끝.”

촌지나 선물을 절대 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내걸고 창간한 지 햇수로 10년이 다되어 간다. 그럼에도 아직도 명절이면 기자들의 집과 편집국으로 택배 상자가 줄을 잇는 걸 보면 관행이라는 게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기자회 사무국장의 자리 뒤에는 별의별 선물상자들이 쌓여가고 있다.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분위기도 모르고 편집국에 찾아와 한 간부에게 상품권을 전달하려다 거절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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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원목상자에 들어있는 한과 선물세트. 사무실까지 들고 가기가 정말 귀찮았다./김주완

여기엔 우리 잘못도 분명히 있다. 이런 관행이 사라질 때까지 끊임없이 알리려는 노력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촌지와 선물 관행이 남아 있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인지, 누가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며, 그것이 언론보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독자의 중요한 ‘알 권리’에 속한다.

‘생색내기로 비칠까’ 걱정 때문에...

하지만 우린 그동안 “안 받기만 하면 그만이지, 그걸 동네방네 떠들 필요야 있겠나” 하는 생각으로 그냥 조용히 처리해왔다. 명절마다 그런 걸 대외적으로 공지하는 게 새삼스럽다는 느낌도 있었고, 우리의 깨끗함을 과시하려는 걸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위의 공지처럼 어쩔 수 없이 선물이나 촌지를 받았을 경우, 기자회가 처리를 대행해왔다. 기자회 명의로 복지시설에 기탁하는 것이다. (2007년 10월 청와대가 경남도민일보 사장에게 보내온 북측 김정일 위원장의 송이버섯 선물도 그렇게 처리했다.)

나도 이번 설을 앞두고 벌써 네 건의 선물을 처리했다. 두 건은 집에 아무도 없는 사이 택배로 왔다. 택배 직원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경비실에 맡겨놓겠다”고 말했다. 보낸 사람이 누구냐고 물은 후 “수취거절(반송)로 처리해 달라”고 했다. 또 한 건은 사무실로 왔다. 역시 수취거절로 처리했다.

나머지 한 건은 나와 아내가 없는 사이 아들 녀석이 멋도 모르고 받아놓았다. 겉봉투에 보낸 사람의 주소는 있었지만 이름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포장을 풀어봤더니 작은 카드에 명함이 들어있었다. 한 대기업 이사가 보낸 거였다.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원목 상자에 한과가 3층으로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차도 없는 내가 이렇게 큰 상자를 회사까지 들고 가려니 순간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에이 그냥 먹어버릴까.’ 사실 몇 년 전 그랬던 적이 한 번 있었다. 먹은 흔적은 금방 사라졌지만, 꺼림칙한 마음은 상당히 오랫동안 남았다. 결국 기본요금 거리밖에 안되는 회사까지 택시에 싣고 와 기자회에 처리를 부탁했다.(나는 평소 자전거 출퇴근을 한다.)

‘어, 도민일보 기자도 선물을 받네?’

그러나 이 방식도 한계가 있었다. 애초 기자에게 선물을 보낸 사람은 그게 어떻게 처리됐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 경남도민일보 기자도 선물은 받네?’라고 오해를 하게 되고, 다음 명절에도 또 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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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쩔 수 없이 받아온 선물은 기자회를 통해 복지시설 등에 기탁하고, 애초 선물을 보낸 이에게 안내문과 영수증을 보내주고 있다. 하지만 선물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보낸 사람에게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남겨 ‘이렇게 처리했으니, 앞으론 보내지 말아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못할 때도 있다. 이번 한과를 보낸 대기업 이사의 경우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일부러 전화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번엔 기자회 사무국장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기자회가 복지시설에 기탁하는 선물의 경우 애초 그 선물을 보낸 사람에게 영수증과 함께 간단한 안내문을 보내자고. 사무국장은 흔쾌히 동의했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한 내 생각은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는다. 생색내기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명절 때마다 신문지면의 1면 사고(社告)를 통해 촌지나 선물을 절대 받지 않는다는 방침을 알리자는 거다. 그리고 명절이 지난 뒤에 다시 한번 수수내역과 처리결과를 독자들에게 알리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1~2년 내에는 명절 때마다 되풀이되는 이런 귀찮은 일이 거의 사라질 것으로 본다.

기자 개개인이 매번 취재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택배사 직원을 상대로 수취거절을 하고, 기자회에 갖다 주고, 복지시설에 배달하고, 영수증과 안내문을 보내고 하는 번거로움보다는 그게 훨씬 간단하지 않을까.

문득 다른 언론사는 이런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더불어 양심적이라 자처하는 시민운동가나 진보정당의 지방의원과 국회의원들은 어떻게 하는지도 궁금해진다. 그들도 우리 같은 고민이 없진 않을 텐데….

   
   
1991년 진주에서 일어난 한 시국사건이 전국 언론에 의해 완벽하게 왜곡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한 것을 계기로 지역신문 기자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진주신문>과 <경남매일>을 거쳐 6200명의 시민주주가 만든 <경남도민일보>에서 자치행정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역현대사와 언론개혁에 관심이 많아 <토호세력의 뿌리>(2005, 도서출판 불휘)와 <대한민국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가기>(2007, 커뮤니케이션북스)라는 책을 썼다. 지금의 꿈은 당장 데스크 자리를 벗고 현장기자로 나가는 것이다.

미디어스(http://www.mediaus.co.kr/)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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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지역신문 기자의 고민과 삶을 담은 책. 20여 년간 지역신문기자로 살아온 저자가 지역신문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기자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풀어낸다. 이를 통해 서로 비슷한 고민을 가진 지역신문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촌지, 살롱이 되어버린 기자실, 왜곡보도, 선거보도 등 대한민국 언론의 잘못된 취재관행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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