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이문열 황석영의 삼국지와 김구용 장정일의 삼국지

김훤주 2009. 2. 4.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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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과 황석영이 저마다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를 번역해 ‘삼국지’로 펴냈다지만 실제로 번역했다고는 믿지 않으며, 그래서 저는 읽지 않는다(이문열 황석영 삼국지는 안 보는 까닭 http://2kim.idomin.com/688)고 했더니 근거를 대라는 댓글이 많이 달려 있더군요.

미리 밝히자면, 그이들 삼국지 때문에 그이들을 제가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쓴 이문열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합니다. 다만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 이문열, 전라도를 무슨 버러지처럼 여기는 이문열은 싫어합니다.

황석영도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무척 좋아했습니다. ‘삼포 가는 길’도 좋고 나중에 펴낸 ‘무기의 그늘’도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객지’를 가장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이 그리했겠지만, ‘객지’가 너무 좋아 따라 베껴 쓰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1. 황과 이의 삼국지는 번역도 아니고 번역 아닌 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이문열과 황석영이 ‘나관중’이 쓴(또는 썼다는) ‘삼국지연의’를 번역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이 경력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이들은 한문 공부를 전문으로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게다가 등단도 일찍 했고 작품 발표도 잦았습니다.

더욱이 ‘나관중’은 원나라 말기 사람인데, 그러니까 600년 남짓 전에 살았고 그이가 쓴 ‘삼국지연의’는 당연히 당시 한문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논어 맹자 대학 중용과 같은 고대 말도 아니고 이른바 ‘백화(白話)’라는 현대 말도 아닙니다.

당대 말글뿐 아니라 풍속이나 시대 상황은 물론 제도나 사회 분위기도 알아야 제대로 번역이 되겠지요. 말씀 드린대로, 한학자 김구용은 74년 20년만에 완역 ‘삼국지연의’를 내놨다가 81년 첫 개정판을 냈고 2000년 두 번째 개정판을 냈습니다.

황석영 삼국지. 창작과 비평.

이문열과 황석영의 경력을 한 번 알아보시지요. 경력에 나와 있는 이런저런 활동과 활동 사이에 그런 공부가 자리 잡을 틈이 있는지도 함께 보시지요. 행여 빈틈이 있다면, 거기에는 그이들의 그 왕성한 사회 활동들이 들어가 있지 않겠습니까?

김구용 같은 진정한 번역은 엄두를 못 내겠지요. 이럴 때 짐작이 되는 수는 한 세 가지쯤 되겠습니다. ①기존 번역물 주로 참고. ②일본어로 번역한 작품을 다시 번역(중역重譯). 아니면 ③번역 하청 공장 가동. 이 말고 무엇이 더 있을까요?

그렇지만 저는 그이들 삼국지연의를 펴낸 뒤에도 앞에 말씀드린 바 제 태도나 감정을 바꾸거나 한 적은 없습니다. 그냥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어요. 다만 옛날에 그이들 작품을 읽었던 바로 그 입맛을 버릴까봐, 손쉽게 찍혀 나온 그 ‘삼국지’는 멀리했을 뿐입니다.

그냥 저것이 그이들 사는 방책이구나, 이리 여겼습니다. 더욱이, 그이들이 평역(이문열) 또는 옮김(황석영)이라고 자기 삼국지 아래 처음 자기 이름을 붙였을 때에는 그다지 문제로 느끼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삼국지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2. 김구용 삼국지연의는 두 번째 개정에만 20년 걸린 번역물이다

김구용 삼국지연의. 솔.

사정이 이렇게 되다 보니 진정한 번역물로는 2000년 나온 ‘김구용 삼국지’에 처지고 말았으며 새로운 우리나라 창작물로는 2004년 나온 ‘장정일 삼국지’에 밀리고 말았습니다. 큰 틀은 원본에 기댄 채로, 이런저런 재구성이나 재해석에만 머문 대가(代價)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김구용 삼국지’는 진짜 날렵합니다. 아마 원본에 충실해서 그렇지 싶습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라는 것도 결국은, 1000년 남짓 중국 사람들 사이에 우리나라 판소리처럼 노랫가락에 붙어 떠돌던 가사를 글로 붙들어맨 것일 테니까요.

유비와 관우와 장비가 처음 만나는 데를 보기로 들자면, 아주 바람 같이 흘러갑니다. 유비가 격문을 보고 탄식하고, 장비와 의기투합하고, 관우와 다시 마음을 맞추고, 도원결의를 하고, 장정을 모으고 말을 마련하는 장면까지 읽는 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깔끔하기도 합니다. 시인이기도 한 김구용의 글솜씨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이인호 한양대 중국언어문화 전공 교수는 이리 말했습니다. “거의 대역(對譯)에 가깝게 번역하면서도 이 정도 문장력을 보였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김구용 문장력은 누구든지 읽어보면 바로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고졸(古拙)이라고나 해야 할까요? 별난 구석이 없고 범상해 보이지만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군더더기는 전혀 없습니다.

김구용 삼국지의 장점은 당연히 나관중 원본에 가장 충실하다는 점입니다. 일부러 유비를 추켜세우거나 조조를 싸고돌거나 하지 않고 나관중 삼국지연의에 담겨 있는 ‘정통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단점일 수도 있습니다.

정통론과 더불어 중국과 중국인의 정서와 문화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보여주는 것을 두고 우리는 그것이 보편타당하다고 착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대로 보고 이해하기만 하고 우리 나름대로 판단하고 취사선택하면 될 일입니다.

3. 장정일 삼국지는 아예 새로 창작한 현대 한국의 삼국지연의다

장정일 삼국지. 김영사.

나관중 삼국지는 중국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남만(南蠻) 북적(北狄) 서융(西戎) 동이(東夷)를 깔봅니다. 그러나 장정일 삼국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제갈량이 일곱 번 사로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주는 맹획을 들 수 있습니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맹획은 일곱 번씩이나 은혜를 베풀었는데도 배은망덕하는 비열하고 싸가지 없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장정일에 따르면 그이는 자기가 소속된 겨레붙이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뺏기지 않고 끝까지 지키려는 의인(義人)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관중은 우리 겨레 조상이라는 고구려에 대해서도 관구검 따위가 한 번 쓸어버리면 그냥 스러지고 마는 존재 비슷하게 그려놓았는데, 장정일은 상당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시대 상황에 맞게 전술도 펼친 존재로 그려놓았습니다.

나관중 삼국지는 알게 모르게 귀족주의 관점에도 서 있습니다. 백성들 중요성은 낮추고 몇몇 중심인물들만 크게 내세웁니다. 뿐만 아니라 견딜 수 없는 폭정을 물리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일어선 농민군을 ‘황건적’이라 하며 낮춰 여깁니다.

장정일 삼국지는 아닙니다. 새로운 관점을 따라 창작을 했습니다. 농민군 활동을 자세히 적었으며 나관중의 ‘황건적의 난’은 장정일에서 ‘황건 기의(起義)’라 바뀌었습니다. 또 나관중은 유비가 황건군과 연합한 사실을 숨겼지만 장정일은 드러내 보였습니다.

나관중 삼국지는 또 남성주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관중은 동탁과 여포 사이에 등장하는 ‘초선’이라는 여성을 사도 왕윤의 ‘미인계’대로 움직이는 자동인형으로 만들었지만 장정일은 독자적으로 개성을 갖춘 인물로 그려냈습니다.

또 나관중은 이른바 춘추필법에 따라 등장인물을 지나치게 정형화해서 결국 형해화하는 데까지 이르기도 했지만 장정일은 소설로 되끌어와 저마다 생기 도는 개성을 갖추려고 애썼습니다. 제가 알기로, 이 부분만큼은 황석영이나 이문열이 꽤 잘한 줄 압니다만.

4. 황석영 삼국지와 이문열 삼국지는 개정판이 필요할까?

이문열 삼국지. 민음사.

뭉뚱그려 말하자면, 이문열이나 황석영이 자기 이름으로 돼 있는 ‘삼국지’에다 번역물이라 하지 말고 창작물이라 하는 편이 훨씬 정직하고 사실과도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미 나와 있는 여러 삼국지연의들을 보고 나름대로 재창조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황과 이는 생각 또는 용기가 모자랐습니다. 이문열 삼국지는 1988년 나왔고 황석영 삼국지는 2003년 6월 나왔습니다. 이문열이든 황석영이든, 책을 펴낼 때, “내가 낸 삼국지연의는 번역물이 아니라 창작물이다.”라고 할 배짱이 얇거나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창작이긴 한데 어정쩡했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우리나라에서 김구용 삼국지와 장정일 삼국지를 칩니다. 이문열과 황석영은 그 아래입니다. 김구용 삼국지는 가장 알차게 번역한 삼국지연의입니다. 장정일 삼국지는 새로운 자세로 주체적으로 패기만만하게 재창조한 삼국지연의입니다.

황석영 삼국지와 이문열 삼국지는 지금이라도 장정일 삼국지를 따르면 좋다고 저는 봅니다. 평역 옮김 따위 용기 없는 낱말은 버리고, 장정일이 후배이기는 하지만 잘하기는 잘했기 때문에, 지금 어정쩡 판본일랑 버리고 ‘창작’ 개정판을 하루빨리 내겠다고 말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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