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장난감 물총 쐈다고 재판받는 김형주씨

기록하는 사람 2009. 2. 2.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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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에 불이 붙었을 때 물을 부으면 불이 더 확산된다는 건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상식이다. 그런데 경찰은 최근 서울 용산 철거민 참사 때 시너 불을 향해 물대포를 쏘아댔다.

이처럼 요즘 한국 경찰은 상황을 가리지 않고 걸핏하면 물대포를 쏘아댄다. 작년 촛불집회 때도 그랬다. 물대포에 색소나 최루액을 섞기도 했다. 기자도 지난해 서울 광화문 집회 현장에서 물대포에 살짝 비켜서 맞아봤는데, 그 위력이 엄청났다. 직격으로 맞으면 몸이 날라갈 정도다.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을 향해 직격으로 쏠 수 없도록 하는 안전수칙은 아예 무시됐다.

물대포로 인한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경찰은 안전한 시위진압 도구라고 강변했다. 이에 열받은 시민들은 '물대포가 안전하다면 니네 집 비데로 써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안전수칙 무시한 물대포 발사는 괜찮고, 항의 표시로 먹물 장난감총 퍼포먼스는 벌금 100만 원

그런 상황에서 작년 6월 29일 광주에서는 경찰의 물대포에 항의하기 위해 약간 익살스런 퍼포먼스를 준비했다. 촛불집회에 참가한 초등학생들이 장난감 물총에 먹물을 넣어 경찰에게 발사하기로 한 것이다.

초등학생들이 장난감 물총에 먹물을 넣어 경찰에게 쏘도록 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김형주씨.


전남대 사회학과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김형주(31)씨는 그날 학교에서 광주역까지 비오는 거리를 걸어갔다. 촛불집회를 준비하고 있던 행사관계자들이 그에게 사회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2002년 제10기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의장 출신인 그는 흔쾌히 마이크를 잡고 집회를 진행한 후 광주역에서 한나라당 광주시·전남도당 건물을 거쳐 금남로까지 행진을 시작했다.

방송차 마이크도 그가 잡았다. 빗속에서 진행된 행진 대열이 한나라당사 앞을 지날 때 경찰과 약간의 실랑이가 일어났다. 아이들이 들고 있던 장난감 물총 때문이었다.

경찰은 물총을 쏘지 말라고 요구했고, 주최측은 '물대포에 대한 항의의사 표시일뿐'이라고 맞섰다. 실랑이 와중에 초등학생들이 물총을 발사했고, 몇몇 사복경찰관의 옷에 먹물이 묻었다.

"경찰 중에서도 꽤 높은 사람인 것 같았어요. 그 사람 옷에도 먹물이 튀었으니 기분이 나빴겠지요."

물총을 쏜 초등학생들을 처벌할 수 없었던 경찰은 사회를 본 김씨를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형사입건했다. 그가 직접 물총을 쏘진 않았지만, 초등학생들에게 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법원은 그에게 벌금 100만 원의 약식명령 판결을 내렸다.

그는 이 과정을 설명하면서 기가 차다는 듯 겸연쩍게 웃었다.

"2002년 한총련 의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과 이적표현물 소지 등 무시무시한 혐의로 2년을 감옥에서 보낸 적도 있지만, 이런 어이없는 일로 다시 재판을 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는 약식명령에 불복해 지난달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그 정도 퍼포먼스를 갖고 사법처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경찰의 감정적이고 경직된 법 적용이라는 거죠. 끝까지 법의 판단을 구해볼 참입니다."

2002년 제10기 한총련 의장 김형주씨를 만나다

그를 지난달 29일 서울의 한 행사장에서 만났다. 검찰과 법원이 '이적단체의 수괴'라며 2년간 감옥살이까지 시켰지만, 머리에 붉은 뿔은 없었다. 검은테 안경과 천진스런 웃음이 순박해보이는 청년이었다.


-작년 7월, 경찰이 사법처리 방침을 밝혔을 때만 해도 언론에 보도도 되고 사회적 관심도 높았는데, 이제 사건 자체가 거의 잊혀진 것 같다. 지역사회에서는 이 재판에 대한 지원 같은 건 없나?

△정식으로 변호사 선임은 하지 않았지만, 지역의 변호사 한 분이 조력을 해주고 있다. 좀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어서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하면 오히려 내가 무안하고 민망할 것 같다. 그냥 내 신념대로 조용히 법의 최종판단을 구해보려 한다.

-한총련 의장으로서 2004년 출소 후 어떻게 지냈나.
△학교(전남대 행정학과)에 3학년으로 복학해 졸업한 뒤, 대학원에 진학해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다. 수료는 했고, 이번 학기에 논문 쓸 준비를 하고 있다.

-논문은 뭘 쓸 건가.
△원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을 주제로 쓰려고 했는데, 작년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그걸 주제로 바꿔 구상을 하고 있다. 촛불집회 과정에서 진보진영의 역할이나 진보진영의 시선으로 본 촛불집회를 분석해보려고 한다. 촛불집회를 집단지성에 의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과거에 비해 진보진영의 역할이 축소됐다고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진보진영이 해야 할 역할이나 나아가야 할 방향이 뭔가 있을 것이다.

-학생운동도 예전같지 않고, 의장을 지냈던 한총련도 거의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된 것 같나.
△학생운동이 실패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선배인 386세대도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결국은 민중의 마음을 얻지 못했으니 실패했고, 한총련 세대도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들어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의 여건이 확실히 좋아졌다. 지난 촛불집회 때만 해도 시민들과 1박2일 토론이 자연스럽게 벌어졌고, 청소년들도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학생운동도 곧 되살아 날 것이다.


-한총련이 민족해방 노선에 너무 경도된 것도 실패의 요인 중 하나는 아닌가.

△사실 대학원에 진학해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도 그동안 좀 (사상을) 편식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좀 더 종합적으로 사회를 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어떻게 운동권이 되었나.
△광주라는 도시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만든 것 같다. 고등학교(광주일고) 다닐 때 박종철 열사와 박승희 열사의 장례식을 봤고, 대학생 형들과 누나들에게서 매일같이 유인물도 받아보곤 했다. 고등학교가 시내에 있어서 매년 5·18 추모행사도 봤다. 그보다 어릴 때 자연스레 80년 광주항쟁 당시의 비디오를 봤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망월동 5·18희생자 묘역에 참배하러 갔던 기억도 있다. 그러다 보니 대학에 와서 자연스럽게 사회의 모순에 눈을 뜨게 된 것 같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뭘 할 건가.
△사회운동을 계속하고 싶다. 구체적으로는 선후배들과 좀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다.

-먹고사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나.
△부자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뭐. 어떻게든 되겠지.

-결혼할 사람은 있나.
△애인이 있다. 그녀도 이번에 대학원을 졸업하는데, 역시 사회운동을 하는 친구다.

-그렇다면 더더욱 먹고 살기 참 힘들겠다.
△킥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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