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동요 산토끼 작가는 미군첩보대 통역관이었다

기록하는 사람 2009. 1. 30.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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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너무 엄혹하다. 마치 박정희 시대나 이승만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실제 현 정권은 이승만을 다시 국부(國父)로 추앙하고 그의 분단정부 수립을 '건국'이라 칭하며 반대세력을 싹쓸이하고픈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승만의 친위조직이었던 국민회와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땃벌떼와 백골단, 민중자결단과 같은 반공우익집단들이 '뉴라이트'로 이름만 바꿔 다시 발호하고 있는 것도 그 때를 연상케 한다.

이럴 때일수록 현대사를 되돌아보면서 역사에서 지혜와 교훈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한국 우익집단과 토호세력의 뿌리' 를 약 50회에 걸쳐 추적해보려 한다. 이 글은 그 세 번째로  해방직후 최초로 결성된 우익단체의 뿌리를 알아 본다.

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3)친미·우익의 뿌리는 친일파와 무정부주의자

"좌익분자들이 서울 건준을 장악했다며?"

"그럼. 벌써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던데? 이름도 인민위원회로 바꾸고 말이야. 이러다 사회주의자들의 천국이 되는 거 아냐?"
"이미 마산에서도 우린 들러리에 불과하잖아. 언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누가 알아?"
"그래 안되겠어. 송진우·김성수 선생이 얼마전 서울에서 한민당(한국민주당)을 만들었다는데 우리도 당장 건준과 인민위원회에 대적할 뭔가를 만들어야겠어."

1945년 9월 6일 서울 건준이 "진주할 미군에게 조선민족의 자치능력을 표시할 당면의 필요"에 의해 발전적 해소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인민위원회 결성 등을 결의하자 마산을 비롯한 경남도내 건준 내부에서도 우익인사들의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부터 사회주의자들이 건준의 주요직책을 장악하고 있었던 데다 우익인사들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져 가는 데 대한 불만도 적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당시 마산 건준에서 명도석 위원장을 보좌하던 경호원 정수영씨의 증언에서도 감지된다.

"손형업이가 건준 간부로 명부엔 올라있었는 지 모르지만 실제 건준에 얼씬도 않았어. 한번도 사무실에서 본적이 없거든?"

손형업은 해방 전까지 일제가 임명한 마산부회 의원을 지냈으며, 3·1독립만세사건 당시에는 일제의 경찰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는 3·1독립만세사건 직전 손문기의 부친 손덕우씨로부터 거금 100원(당시 쌀 한섬에 3원)을 받고 경찰 옷을 벗었다고 한다.(박계진, 합포의 야화 제2집, 1973, 마산의정동우회 간)

친일 우익인사 건준탈퇴…좌우대결 시작

이에 따라 손씨(재무부장)를 비롯한 이일래(선전부장)·조병기(총무부장) 등 건준 내 우파세력과 무정부주의자 등 26명은 탈퇴성명서를 발표하고, 마산에 '한민회(韓民會)'라는 해방 후 최초의 우익단체를 결성하게 된다. 10월 8일 스미스(Smith) 대위를 중대장으로 하는 미 40사단 선견대가 마산에 도착하기 전인 9월 말쯤의 일이다. 박계진씨의 책에 따르면 마산에서 우익과 좌익이 완전히 갈라선 것은 바로 이때부터라고 한다.

이렇게 결성된 한민회는 동경제대 출신으로 일제때 역시 부회 의원을 지냈던 친일파 민영학씨를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총무부장에 조병기(무정부주의자), 조직부장에 류석형(무정부주의 성향, 이후 자유당 마산시의원), 선전부장에 최철용(신간회 활동경력, 47년 경남경찰국장), 문화부장 이일래(산토끼 동요 작곡가, 이후 미 CIC통역관), 재정부장 손형업(일제 경찰 및 친일 부회 의원 출신) 등 조직을 인선한 후 창동에 사무실을 두었다.

동요 산토끼의 작사 작곡자인 이일래는 마산 최초의 친미우익단체인 한민회 간부로 미군 통역관을 지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한민회에는 이들 간부 외에도 손문기, 강태호, 안장수, 최양기, 손성수, 박재환, 옥치윤, 김수돈, 김관수 등이 참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 일제시대 친일파와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축을 이뤘던 것이다.

이처럼 우익인사들이 건준을 탈퇴한 후 마산 건준은 10월초 서울과 부산에 이어 마산시 인민위원회(인위)를 결성한다. 마산 인위에 김명규·이정찬·박삼조 등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한 것은 물론이다.

한민회는 이후 미군이 마산에 진주하자 손문기를 통해 "미군이 한국을 떠나고 나면 인민위원회는 우리를 제거할 것이다. 인민위원회는 공공연한 공산주의자다, 마산에서 발생할 지 모르는 그 어떤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순찰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미 40사단 보고서, 한국 근현대사회변혁운동, 풀빛, 1997)

또 한민회 간부인 이일래가 미군 특무대(CIC)의 통역관을 맡았다는 점(왕수완, 마산유사, 경남신문, 1986년 9월 3일자)을 감안하면 이때부터 한민회는 미군정에 대한 열렬한 협조기구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인민위원회는 미 군정 및 우익과 첨예한 대립상황에 놓이게 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근현대 인물자료 검색.


미군, 우익과 손잡고 시민자치권력 전면 부정

이처럼 마산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명도석)의 진보적 색채에 불만을 품고 딴살림을 차린 우익인사들은 창동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때마침 마산에 도착한 미군의 적극적인 협조자가 됐다.

마산에 처음으로 미군이 들어온 것은 1945년 10월 8일이었다. 스미스 대위를 책임자로 하는 미 제24군단 40사단 선발대는 우선 건준과 인민위원회(위원장 김명규)가 장악하고 있던 치안력을 접수했다. 그리고 우익단체인 한민회(위원장 민영학)와 손을 잡고 다른 지역처럼 인민위원회의 자치권을 박탈하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섰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같은 정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선 당시 미군정의 한국 점령 과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서울에 미군이 처음 입성한 것은 마산보다 한달 빠른 9월 8일이었다. 서울을 점령한 하지 중장과 미 2군단 병력은 9일 총독부에서 일본군의 항복식을 거행한 후, 10일 군정포고 1호를 선포한다.

14일 군정 장관 아놀드는 건준과 인민위 소속의 치안대 학도대 보안대 청년대 등을 불법적인 경찰력 행사 단체로 간주해 즉각 해산 명령을 내리게 되며, 이틀 뒤인 16일 해리스 준장을 단장으로 하는 시찰단이 부산에 도착한다. 또 23일에는 군정포고에 따라 오후 8시 이후 통행금지가 실시됐고, 이어 부산의 치안사령부가 미 군정에 의해 강제해산됐다.

인근 진주에는 마산보다 며칠 빠른 10월 2일 사프 대위를 책임자로 하는 선발대가 도착한다.(장상환, 해방직후 진주지역의 정치변동, 경상사학 95. 12) 이어 진주지역 미군사령관 웨이트사이드 중령은 10월 11일 진주시청 회의실에 관리와 각 단체장, 지역유지 등 300명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군정 실시방침을 천명했다.

"인민위원회가 있다 하는데 이 모든 것을 조사한 다음 치안을 문란케 하는 정당과 단체는 전부 해산시킬 것이며 가장 이상적인 것은 우리도 지지할 것이니…전폭적인 지지와 협력을 구한다."

웨이트사이드 중령의 이같은 발언은 전날인 10일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이 인민위원회를 자치권력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데서 비롯됐다.

마산에서도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어떤 형태로든 이런 방침이 전달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마산의 미군은 인민위원회를 '치안을 문란케 하는 정당과 단체'로 간주했으며,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한민회를 선택했다. 이는 당시 미군정 기록(40사단 G-2 보고서)도 인민위원회를 공공연한 공산주의자, 한민회를 온건주의자로 분류하고 있는 데서도 나타난다.

이에 따라 마산에 진주한 미군은 10월 18일 시범케이스로 창원 인민위원회 배종인 위원장을 군정법 위반으로 감금하기도 했다. 창원 인위는 본부를 마산에 두고 있었으며, 마산 인위보다 훨씬 강력한 조직력으로 한때 창원군청을 접수하고 군의 행정이 이미 인위의 통제하에 있음을 미군에 통보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박철규, 해방직후 마산지역의 사회운동, 한국근현대사회변혁운동)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경남도민들은 이런 분위기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미군을 해방군으로 보고 열렬한 환영행사를 갖는 등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진주에서는 수천명의 시민이 모여 샤프 대위 일행을 환영했고, 이튿날인 10월 3일 진주중학교 교정에서 6만명의 시민들이 모여 개천절 기념식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 샤프 대위를 초청, 내빈축사를 요청하기도 했다.

마산에서도 10월 24일 오후 2시 인민위원회 주최로 미군 환영문제와 시민 행동통일문제, 귀환동포 구호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토론회를 개최한다. 마산 인위는 이 자리에서 7명의 전형위원을 선출, 30명으로 구성되는 '미 진주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고, 시민 행동통일을 위해 '조선독립촉진 마산협의회'를 구성, 10월 28일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그 가결권을 시민대회에 위임키로 했다.

이에 따라 마산의 각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 160명은 인민위원회와 한민회를 망라하는 '조선독립촉진 마산협의회'를 28일 공락관(이후 시민극장, 현재 옷가게)에서 정식 발족하게 된다. 이들은 "마산의 모든 다양한 그룹과 정당의 활동을,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앞당기기 위하여 미군정과 충분한 협조 속에서 조화시킨다"고 결의했다.

독촉 마산협의회 발족식이 열렸던 마산 시민극장 자리. 지금은 '싸지'라는 옷가게가 되어 있다.

민전과 국민회로 분화…10월 봉기로 전면충돌

조선독립촉진 마산협의회(의장 이정찬)의 특징은 마산 인민위원회(인위·위원장 김명규)와 한민회(위원장 민영학)로 분리됐던 좌·우익세력이 이 단체 결성을 계기로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이다.

위원장 이정찬은 마산 인위 부위원장으로 일제 때부터 사회주의 계열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였으며, 재정부장 김형진 역시 30년 신간회 시절부터 골수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구호부장 옥문환도 전국인민대표자대회 마산시 대표로 참가했으며, 이후 남로당원과 민주주의민족전선 간부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자였다. 또 선전부에서 활동한 김귀동은 지금 경남신문의 전신인 남선신문을 창간(46년 3월 1일)한 언론인으로 역시 일제 때 신간회 활동을 함께 했던 민족운동가였다. 인사부장 명도석은 중도좌파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며, 총무부장 이봉수는 어시장 점원 출신으로 마산 노동야학을 졸업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 마산노동회와 청년회 등 활발한 활동을 벌여온 사람이다.

마산시 홈페이지의 김종신 사진.

반면 부의장 김종신은 1930년대엔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기도 했으나, 일제 말기 친일파로 변신하고, 해방 후 우익운동에 앞장서 마산시장과 자유당 국회의원 등을 지낸 인물이다. 또 부의장 민영학 역시 일제 말기 부회의원을 지냈으며, 해방후 미 군정 고문 등을 지낸 친일-친미 우익인사였다. 자료부장으로 참여한 안장수도 일제 때 친일 부회의원 출신이다.

이처럼 좌·우익은 물론 중도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까지 함께 참여한 가운데 마산 독촉이 결성된 것은 이 단체의 결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빨랐다는 데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1945년 10월 23일 서울에서 이승만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결성된 이후 부산에서 이 단체의 경남지부가 결성된 것은 11월 21일이었다. 그러나 마산의 독촉은 이보다 한달 앞선 24일 인민위원회에서 조직결성을 논의한 후 28일 결성식을 가진 것이다.

따라서 이때는 서울의 독촉이 우익단체로서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서울 역시 우익정당과 사회단체는 물론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및 중간노선의 정당·사회단체까지 망라하고 있었다.(박창수,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지양사, 1984)

그러나 10월 31일 박헌영이 이승만에게 "독촉중협에서 친일파를 배제시킬 것"을 요구하고 나서면서(김천영, 연표 한국현대사, 한울림, 1986) 서울 독촉에서 좌익계열 인사들이 독촉과 결별하게 되고, 12월 19일 이승만이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을 서울중앙방송을 통해 발표하면서 독촉은 완전한 우익단체로서 성격을 분명히 하게 된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마산의 독촉은 인민위원회와 한민회 등 좌·우익을 대표하는 조직을 그대로 존치한 상황에서 양측이 미군 진주를 환영하기 위해 임의로 만든 단체의 성격이 짙다. 특히 마산 인위로선 미군이 갖고 있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적대감을 완화하고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제스춰의 일환으로 독촉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결국 서울의 독촉중앙협의회가 좌익과의 절연을 선언하고, 부산 등에서 우익단체의 성격을 분명히 한 독촉 경남지부가 발족되자 마산의 인위 세력들도 이 조직을 이탈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독촉 마산협의회의 지속적인 활동기록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얼마 안가 조직 자체가 흐지부지 와해돼 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쨌든 인민위원회는 이후 미군정의 집중적인 탄압을 거쳐 1946년 2월 4일 민주주의 민족전선으로 개편되며, 한민회는 같은해 2월 창동 사무실이 좌익세력의 습격에 의해 불타는 수모(왕수완, 마산유사, 경남신문 1986년 9월 25일)를 겪은 이후 서울에서 이승만이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 중앙위원회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통합해 결성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국민회)'의 마산지부(위원장 손문기)를 만들어 극심한 좌·우익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미군정은 이 과정에서 한민회 위원장인 민영학을 고문으로 위촉하고, 지역유지 옥기환을 마산시장으로 선임하는 한편 인민위원회와 민전에 대한 탄압을 강화한다. 이같은 좌·우익의 대립과 미군정의 탄압과정에서 좌익세력은 해방후 최대의 희생자를 낳은 1946년 10월 마산 인민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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