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1945년 해방의 기쁨은 2개월뿐이었다

기록하는 사람 2009. 1. 2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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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너무 엄혹하다. 마치 박정희 시대나 이승만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실제 현 정권은 이승만을 다시 국부(國父)로 추앙하고 그의 분단정부 수립을 '건국'이라 칭하며 반대세력을 싹쓸이하고픈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승만의 친위조직이었던 국민회와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땃벌떼와 백골단, 민중자결단과 같은 반공우익집단들이 '뉴라이트'로 이름만 바꿔 다시 발호하고 있는 것도 그 때를 연상케 한다.

이럴 때일수록 현대사를 되돌아보면서 역사에서 지혜와 교훈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한국 우익집단과 토호세력의 뿌리'를 약 50회에 걸쳐 추적해보려 한다. 이 글은 그 두 번째로  해방직후 건국준비위원회 결성 당시 상황을 알아본다.

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2)해방 직후 불안해진 친일파

1945년 8월 17일 공락관(시민극장)에서 결성식을 가진 마산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명도석)는 사무실을 당시 마산백화점 2층(산업부장 강태호가 운영하던 것으로 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 지금은 마산특별시라는 술집으로 쓰이고 있다)에 두고 업무를 시작했다.

마산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식을 열었던 마산 시민극장(옛 공락관)은 현재 'SSazy'라는 옷가게로 쓰이고 있다.


당시 경호대장으로 명도석 위원장을 가까운 거리에서 모셨던 정수영씨(99년 증언 당시 76세)의 증언에 따르면 건준의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는 해방공간의 치안유지였다. 특히 해방으로 인해 일본인과 친일관료들의 행정력이 일시에 무력화된 상황에서 건준은 마산의 정치와 행정을 모두 장악한 시민자치권력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불안해진 사람들은 해방직전까지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해온 친일파들이었다.

"일제말기 경방단이라는게 있었지. 말하자면 요즘의 민방위대 같은 조직인데 왜놈들의 유화정책을 한답시고 조선 사람한테 경방단장을 맡겼어. 세도가 대단했지. 경찰서장도 쩔쩔 매던 정도니까. 위안부도 이 경방단에서 모집해 보냈어."

건준이 업무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해방 때까지 경방단장을 맡고 있던 한모씨가 보따리에 돈을 싸들고 명도석 위원장을 찾아왔다. 당시 명 위원장은 흰색 한복차림으로 총무부장 조병기와 함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한씨는 당시 요리집 등을 운영하던 부호였다. 명 위원장 앞에 넙죽 엎드린 한씨는 대뜸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건준 재정으로 사용해 주십시오"하고 돈 보따리를 내놓았다. 요즘으로 치면 적어도 5000만원~1억원 정도 되는 돈이었다.

당시 건준은 종이 한 장까지 명도석 위원장의 사비로 충당했다. 위원장은 치안대 대원들에게도 절대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엄히 지시해놓은 상태였다. 끝까지 창씨개명도 거부하고 꼿꼿한 삶을 살아온 그는 한씨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더러운 돈을 가져오느냐. 즉각 갖고 가지 못하겠느냐."

혼쭐이 난 한씨는 그길로 쫓겨난 후 건준 근처에는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산월정이라는 유곽을 경영하던 허 학이라는 사람이 또 돈 보따리를 들고 찾아왔다. 그때도 명 위원장은 "살(人肉)장사 하던 놈이 어디라고 찾아오느냐"며 호통을 쳐서 쫓아 보냈다.

정수영씨는 친일파 부회의원이었던 손형업이 건준 재무부장을 맡았다는 기록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건준 사무실에서 한번도 그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처음 명부에만 그렇게 올려놓고 실질적인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풀이했다. 실제로 손씨는 얼마 안돼 건준을 탈퇴하고 우익단체인 '한민회'에 가담하게 된다.

건국준비위원회 치안 장악에 숨죽인 친일파들

그러나 이들 친일파들이 건준에 의해 어떤 처벌이나 제재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해방 전 일제의 경찰 노릇을 하던 조선인이 의분을 참지 못한 젊은이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전해진다.

김해출신 고정수라는 청년이 허 형사로 불리던 일본 경찰을 부림동 금곡원이라는 요리집에서 단도로 응징한 사건이다. 허 형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고정수는 사건직후 도피했다. 당시 마산시민들은 이 일을 모두 통쾌하게 여겼고 범인 고정수를 마산의 영웅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사건시효가 끝난 후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살다 병으로 죽었다.

또 마산의 고성여관집 아들이 일본인 술도가(양조장) 사장을 일본도로 즉사시킨 일이 있었다. 이후 그는 강도살인 혐의로 미 군정법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도 사실은 민족감정이 근본적인 동기였다고 전해진다.

이밖에 10월초 마산에서는 일본인들이 경비하던 창고가 습격당해 군인 1명이 사망했으며, 일본인 중대장이 그의 저택에서 살해당했다는 기록(박철규, 해방직후 마산지역의 사회운동, 역사연구 5호, 1997)도 있다.

그러나 건준은 오히려 일본인과 조선인의 충돌을 막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일본군은 패전으로 인해 독이 올라 있었고, 우린 해방을 맞아 의기양양한 상태였어. 그러나 우린 빈손이었고, 왜놈들은 여전히 무기를 갖고 있었지. 충돌하면 우리가 불리한 상황이었어."

정수영씨에 따르면 당시 건준 치안대(정씨는 '보안대'로 기억하고 있었다)의 대원들도 일부 간부를 제외하고는 무기를 상시휴대하지는 않았으며, 필요할 경우 몽둥이 등을 이용했다고 한다. 대원들은 샤쓰에 검은 물을 들여 복장을 통일했으며, 팔에 '건준 보안대'라는 완장을 차고 다녔다.

마산 건준 치안대 본부로 쓰였던 경남자동차주식회사 터는 현재 경남은행 창동지점과 하나증권으로 쓰이고 있다.


치안대(대장 박삼조)는 건준 사무실 바로 맞은편의 단층건물인 경남자동차주식회사를 본부로 사용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조철(朝鐵)자동차부 자리였으며, 이후 경남은행 본점으로 사용돼오다 지금은 경남은행 창동지점과 증권회사로 쓰이고 있다.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대가 건준 사무실에 몰려와 명도석 위원장을 위협한 사건이 있다. 이들은 건준이 다량의 무기를 확보하고 일본군대를 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 "일본군의 생명과 재산에 위협을 가하고 탈취할 경우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며 건준 사무실을 포위하고 무력시위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마산시사)

그러나 박계진씨는 <합포의 야화>(마산의정동우회, 1973) 2권에서 "알고 보니 일인들이 일본으로 가기 위해 준비해 둔 배 기름을 건준 청년들이 압수한 까닭"이라고 적었다.

이와 관련, 정수영씨는 "당시 내가 보안대원들을 데리고 대구에서 철수해 온 일본 보병연대의 군수품을 압수한 적이 있다"면서 "그때 그들이 타고 온 트럭에서 압수한 군수품 중에는 휘발유 10여 통도 있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말을 미뤄볼 때 어쨌든 일본 군인들은 자신들의 군수품을 압수한 건준에 대해 항의의 뜻으로 건준 사무실을 찾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건준은 부산과 마산에 이어 진주, 창원, 함안 등 도내 전역에서도 속속 결성됐으며, 일부지역에서는 면단위 조직까지 결성됐다. 이들 조직은 함안군 연합자치유지회, 창원군 대산면 인민자치위원회 등으로 명칭도 약간씩 달랐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해방 후 일본 헌병에게 피살당한 창원 상남면 건준위원장

그런데 창원군 상남면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배정세)는 해방후 잔류해 있던 일본 헌병들로부터 끔직한 만행을 겪게 된다.

해방 10일째인 8월 25일 오후 2시 배정세 위원장이 살던 창원군 상남면 토월리에 일본 헌병 30여명이 갑자기 트럭을 타고 들이닥쳤다. 건준이 일본 군용트럭을 압수했으니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배 위원장과 황의근, 문기수, 정용관 등 젊은이들은 육탄으로 이들 헌병과 맞섰으나 역부족, 포박을 당한 채 진해 해군사령부로 끌려갔다. 나머지 청년들은 모진 고문 후 풀려나왔으나 배 위원장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후 미군이 들어온 후 진상을 알고 보니 일본 헌병들이 진해로 끌고 간 당일 손을 묶은 채 배 위원장을 바다에 수장시킨 것이었다. 관련된 헌병들은 무기징역 등을 받고 일본으로 송환됐으나 배 위원장의 시신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한편 건준은 10월 8일 미군이 마산에 도착하면서부터 세력이 급속히 약화된다. 미군이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해방의 기쁨은 2개월도 채 이어지지 못했다.

선견대격인 스미스 대위와 이후 마산군정청장인 데일리 소령이 부임하면서 전진원 초대 마산경찰서장이 취임하자 건준 치안대의 역할도 사실상 소멸된다. 또 이때를 즈음해 일부 우익인사들이 건준을 탈퇴, 한민회를 결성하고, 건준은 인민위원회로 개편을 단행하게 된다.

그 때부터 숨죽이고 있던 친일파들은 한민회라는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다시 기를 펴게 되고, 이들은 미군정에 빌붙어 좌익 척결에 앞장서게 된 것이다.

※이전 기사 : 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1)건국준비위원회의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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