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언론

한심한 박희태, 더 한심한 기자들

김훤주 2009. 1. 22.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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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5일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경남에 왔습니다. 창원 팔룡동 미래웨딩캐슬에서 열리는 한나라당 경남도당 정책설명회 참석을 위해서입니다. 박 대표는 한나라당 신문법 방송법 개정안을 두고, 모르는 소리를 제대로 했습니다.


기자들도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박 대표의 무식을 짚은 기자는 (자랑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만) 저희 경남도민일보 소속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집권당 대표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개정하려 하니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어야 마땅한데도 말입니다.


결론 삼아 말하자면,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도 법률안의 내용을 제대로 몰랐고, 이에 맞서 파업까지 벌인 언론노조에 소속된 기자들도 똑바로 몰랐습니다. 기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보다 못한, 말하는 대로 적어주는 받아쓰기 기계밖에 못 됐습니다.


오히려 “MB악법(惡法)이 아니라 MB약법(藥法)이다.”라는 박 대표 주장이 더 크게 취급됐습니다. 현장에 있던 기자 대부분이 언론노조 조합원이고, 언론노조가 최근 보름 가까이 악법 저지를 위해 파업을 벌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15일 정책설명회 장면. 플래카드가 제게는 가소롭게 보입니다.

저희 신문 16일치에 나간 박 대표의 발언입니다. “지금은 재벌이 방송에 투자할 수 있는 게 4%다. 재벌이 MBC라든지 방송에 투자할 수 있는 게 4%. 이를 10%로 늘리려고 방송법 개정을 추진한다.”


이 기사는 이어 “그는 네 손가락을 펴 보이며 ‘4%로는 부족해서 10%로 늘리는 것이다. 아예 늘리는 게 아니다. 10%로 늘린다고 재벌이 방송을 장악하겠나. 90%가 있는데……’라고 말했다”고 돼 있습니다.


사실과 다릅니다. 현행 신문법 방송법은 신문과 재벌의 방송 진입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나라당 개정안의 핵심은 ‘△지상파 방송은 20%까지 △종합편성채널 방송은 30%까지 △보도전문채널 방송은 49%까지’ 소유할 수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박 대표는 개정안의 주요 내용을 몰랐습니다. 한심하지요. 저러고도 집권당의 대표라니……. 그러나 한심하기로 치면 기자들이 훨씬 더 심합니다. 잘잘못을 따져 제대로 기사를 쓰기 위해서도, 언론노조 조합원으로 제 노릇을 다하기 위해서도 알아야 하는 대목인데도 까맣게 몰랐습니다.

서울에 본사가 있는 신문·방송·통신은 박 대표 발언을 죄다 ‘2차 법안 전쟁 앞두고 여야 이번엔 홍보 전쟁’이라는 구도로 다뤘습니다. 그러다 보니 박 대표 발언의 구체 내용은 사라지고 “악법이 아니라 약법” 발언에 초점이 맞춰진 것입니다.


경남도 비슷했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경남도민일보만 박 대표 발언의 구체 내용과 함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비판했습니다. CBS 노컷뉴스는 15일 당일 기사에서 ‘4%’와 ‘10%’를 적기는 했습니다만, ‘틀린 사실’이라 짚지는 않았습니다.

CBS 노컷뉴스는 다만 이튿날 아침 8시54분 ‘정보 보고’에서 ‘한나라당 대표도 모르는 미디어법’이라는 제목으로 “박희태 대표가 하루 전날 열린 정책설명회에서 미디어 법안과 관련해 잘못된 발언을 함”이라 올렸습니다.

그러면서 “○…박 대표의 잘못된 발언이 나가자, 일부 의원이 뒤늦게 부랴부랴 해명에 나섰으며 주변에서는 ‘입법 전쟁’을 준비하는 당의 대표가 법안 내용도 몰라서 뭘 어쩌겠냐는 반응”이라고 끄트머리에 적었습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집권당 대표조차 모르는 채로 미디어 법 개정을 추진했다.’는 중요한 사실(fact)이 묻히는 과정입니다. 만약 이 같은 발언이 (조중동을 뺀) 신문과 방송에서 제대로 다뤄졌다면 그 파장은 틀림없이 엄청났을 것입니다.

국민적 공감대는커녕, 한나라당내 공감대 형성도 없이 미디어 악법을 추진했음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급해 이리 서둘러 악법을 밀어붙이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폭넓게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설 명절 민심의 향방을 좌우할 쟁점 하나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경남도민일보가 지난 연말과 연초 언론노조 파업에서 제 노릇을 못한 데 대해서는 많이 반성하고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 겸연쩍음을 무릅쓰면서도 이리 글을 적는 까닭은, 설 연휴 지나면 곧바로 닥칠 이른바 ‘제2차 악법 전쟁’이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白戰不殆)’는 잘 아실 것입니다. 자신과 상대방을 모두 잘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지요. 그 뒤에는 이런 구절이 이어집니다.

‘부지피이지기 일승일부(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패(不知彼不知己 每戰必敗)’. ‘상대는 모르고 자기만 알면 반타작이라도 하고, 자기와 상대 모두를 모르면 싸우는 족족 깨진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요?


김훤주

※ 매체 비평 전문 인터넷 매체 <미디어스>에 1월 19일 실었던 글을 꽤 많이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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