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고구려’ 국호의 어원은 습지다?

김훤주 2008. 12. 24.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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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라는 한자는 ‘고구리’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근거는 뚜렷합니다. 이치에 합당하기도 합니다. 옥편에서 麗를 찾아보면 ‘아름다울 려’와 ‘나라이름 리’가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2004년 7월 고구려를 깊이 연구하는 학자 이이화 선생을 강연에 모신 적이 있는데, 그 때 물었더니 “글쎄, ‘리’가 맞겠지.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현실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이러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고구려라도 관계없지만 고구리라면 ‘현실적으로’ 좀더 의미가 있음직한 영역이 있습니다. 먼저 ‘高句麗’라는 낱말이, ‘高句麗’라는 나라가 성립하기 이전에 이미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 역사책에서는 예수 기원전 37년에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언저리에 ‘高句麗’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원전 75년 한나라가 세운 사군(四郡) 가운데 하나인 현도군의 으뜸 마을 이름도 ‘高句麗縣’이라 돼 있습니다.

高句麗라는 나라에 앞서, 高句麗라는 세력이 먼저 있었음을 일러주는 대목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민족지상주의라고나 할만한 관점에서 이 高句麗를 ‘고구리’에서 더 나아가 ‘고우리’나 ‘가우리’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습니다.

고구려 강의를 하는 이이화 선생. 경남도민일보 사진.

물론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고우리는 ‘곱다’에서 왔는데, 2000년 전 高句麗 사람들이 곱다-고우니 따위로 발음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아예 성립이 안 됩니다. 500년 전 조선 시대에도 ‘곱다’가 변용될 때는 이응(ㅇ)이 아닌 ‘입술 가벼운 비읍(ㅸ)’ 소리를 냈거든요.

‘가우리’는 더욱 어렵습니다. 高句麗라는 한자에서 ‘우주의 중심’이라는 ‘가우리’를 추출해 내는 능력은, 그야말로 가공스러운 수준입니다.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한 후배에게 물었더니 중국말로 高(句)麗가 ‘까오(쥐)리’로 읽힌다고는 합니다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高句麗=高+句麗. 여기서 高는 고족(族)을 뜻합니다. 저는 고주몽의 고(高)나 대조영의 대(大)나 왕건의 왕(王)이 다 같은 뜻이라고 봅니다만 어쨌든 여기서는 ‘고(高)’라는 겨레붙이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句麗는 무엇일까요? 물론 제 얘기는 고증 또는 논증을 거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보시는대로 근거도 많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의 개연성 제기 정도는 되리라 봅니다.

句麗는, 제가 보기에 골(고을)을 한자 소리를 빌려 나타낸 것입니다. 골은 고을의 줄임말이고 고을은 사람이 어울려 사는 꽤 큰 단위를 이릅니다. 또 골은 골짜기를 뜻하기도 합니다. 행여 ‘굴’을 떠올리는 이도 있을 수 있는데 굴(窟)은 그러나 중국글말입니다.

우리 말을 중국글을 빌려 나타낼 때 앞엣글이 초성(初聲)과 중성(中聲)을 이루고 뒤엣글은 종성(終聲)을 이루는 보기는 많습니다. 제가 태어나 자란 경남 창녕의 옛 이름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가 그 보기입니다.

고구려는 민족주의자들의 관심을 크게 받습니다. 공연 리허설 장면.

눈치 빠른 이는 바로 짐작하시겠지만, 비사벌과 비자화는 다르지 않고 같습니다. 먼저 뒤에 붙은 ‘벌’과 ‘화’는 각각 소리와 뜻으로 읽습니다. 그러면 ‘벌’과 ‘불’이 되는데, 이것은 벌판과 뜻이 통합니다.

비사와 비자는 그러니까 앞에 말씀드린 식으로 초성 중성 종성을 구성하면 바로 ‘빛’이 됩니다. 저는 해모수와 해부루도 이런 식으로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해모수는 그러니까 해못(日淵)이 되고 해부루는 해불(日火)이 됩니다.

高句麗는 말하자면 고족이 다스리는 고을 또는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句가 초성과 중성으로 쓰이고 麗가 종성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에서도 사실로 입증이 됩니다. 주몽이 건국한 데가 어디인지를 알아보면 됩니다. 압록강 지류 동가강 일대입니다.

압록강 중류에 있는 집안으로 나중에 으뜸 고을을 옮기는데요, 이런 지역은 “깊은 골짜기와 산이 많고 하천 둘레에 좁은 평야가 이뤄져 있는 곳”입니다. 전형적인 습지입니다. 저는 제 얘기를 두고 터무니없다고만 할 수는 없다 여깁니다만, 여러 분 생각은 어떠신지요?

김훤주

고구려 무덤벽화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지은이 편집부 (주자소,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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