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언론

'빠구리' 때문에 당한 황당한 표절

김훤주 2008. 3. 17. 01:25
반응형
표절을 당했습니다. 황당무계하고 어처구니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웃음밖에 안 났지만, 생각할수록 불쾌해졌습니다. 결국에는 수치감마저 밀려들었습니다.

저는 좋은 뜻으로 썼는데 표절은 상업적으로 악용했습니다. 전라도 표준말의 말맛이 쫀득쫀득해서 좋다는 취지로 쓴 글이 표절에서는 아주 선정적으로 바뀌어 아무 뜻없는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빠구리' 때문에 당한 일입니다. 전라도를 대표하는 월간지 <전라도닷컴>에 2002년 10월 26일자로 '"야, 빠구리 치러 가자"'를 실었습니다. 이것을 월간 <유모어 뱅크>라는 '에로빵빵한' 잡지가 2004년 10월 창간호에서 '전라도 빠구리와 경상도 빠구리'로 베껴썼습니다.

베껴쓰면서, 당연히 전라도 표준말의 쫀득쫀득함에 대한 내용은 사라졌습니다. 제 글이 이렇게도 변신당할 수 있다니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야하게 속옷만 걸쳐 입은 글과 그림들의 틈새에 끼여 팔다리가 잘려 나간 채 초라하게 떨고 있었습니다.

원문을 올립니다. <유모어 뱅크>가 고치거나 빠뜨린 대목은 붉게 표시했습니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97년에 전라도 친구한테서 들은 얘깁니다. 장소는 광주, 82년(92년)인가 대학 1학년 때였답니다. 중간고사를 다 치른 때라니 늦봄쯤 됐겠지요. 오전 수업 마치고 점심까지 먹어서 나른해진 사람들, 오후 수업도 잔뜩 있었지만 강의실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나 봅니다.

입학하고 두 달 남짓 지났으니 서로 서먹서먹함도 많이 가셨겠지요. 강의실 앞 잔디밭에서 전부 다 뭉기적뭉기적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지 못하고 있는데 친구가 그랬답니다. “야, 빠구리 치러 가자!” 아니면 “빠구리 하러 가자!”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행 가운데 경상도에서 유학 온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이 말을 듣더니 갑자기 낯빛이 붉어지면서 표정이 야릇하게 바뀌더랍니다. 아주 난처한 듯, 안절부절 못하더랍니다.

스무 살 젊은 나이에 남 생각 그리 많이 합니까? 경상도에서 온 동료 낯빛이야 바뀌든 말든, 일행은 누군가 그래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반가운 소리를 지르며 나주 쪽으로 빠져나가 ‘한 빠구리 잘 치고’ 돌아왔답니다.

남녀도 알맞은 비율로 섞였을 테고 주머니를 털어 먹고 마실 거리도 장만했을 테니, 들판이나 강가 시원한 데 자리잡고 한 판 오지게 잘 놀았겠지요. 물론 술도 한 잔 걸쳤겠고 기타를 두드리며 노래하고 춤추거나 재미나는 놀이도 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경상도에서 온 여자아이도 ‘마지못해’ 같이 갔다가  ‘결국은’ 잘 놀았다고 합니다.

경상도 친구가 달라졌답니다. 틈만 나면 웃으면서 “또 빠구리 치러 가자!”, “빠구리 언제 하러 갈래?” 하기 시작했답니다. 제 전라도 친구는 경상도 친구가 조를 때마다 가지는 못했지만, 한 번씩 이리저리 같이 다니면서  ‘빠구리를 치곤 했다’고 합니다. 물론 단 둘이 간 적도 있지만 주로는 여럿이 어울려서 쳤답니다.

저는 이 얘기를 듣고, 한참이나 눈물이 나도록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전라도 빠구리와 경상도 빠구리는 달라도 아주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 전라도 친구도 나중에 자기 경상도 친구한테서 서로 뜻이 다르다는 말을 전해 듣고 크게 웃었답니다.

전라도 말 ‘빠구리’는 경상도 말로 ‘땡땡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해야 할 일 하지 않고 제 맘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놀아버리는 것을 일컫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는 심심찮게 ‘담치기’를 해서 ‘땡땡이’를 치기도 했었습니다.

경상도 말 ‘빠구리’는, 전라도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 하면 어울리지 않는 남녀가 잘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붙어먹는’ 것을 이릅니다. 이를테면 중국 노나라 공자의 부모가 한 야합(野合) 같은 것이지요. ‘들판에서 붙었다’, 이 말 아닙니까.

옛날 같으면 보리밭이나 방앗간 요즘 같으면 무슨무슨 모텔에서, 남의 남편과 남의 아내가 아니면 그냥 좋아하는 처녀 총각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엉겨드는 걸 경상도에선 ‘빠구리’라 한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 전라도 친구의 경상도 친구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럽고 난처했겠는지, 둘만 있어도 민망할 텐데 열 명도 넘는 사람이 한꺼번에 떼 지어 ‘빠구리’를 하러 가다니!

그런데 전라도식으로 한 빠구리 잘 하고 온 우리 경상도 낭자, 경상도와 전라도가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얼마나 재미있어 했을까요. 그 뒤 자기 친구(들)한테 ‘빠구리 하러 가자’고 할 때마다, 아마 지역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이 말의 맛을 쫀득쫀득 씹었을 겁니다.

경상도에선 ‘뺨 맞아도 쌀만큼’ 욕이 되거나 아주 민망한 말이, 자기가 유학 온 전라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쓰인다는 게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저는 짐작만으로도 웃음이 납니다. 또 틈이 날 때마다 ‘웃으면서’, ‘하(치)러 가자’고 조름으로써 조금씩 마음으로 일탈(逸脫)하는 즐거움도 작지 않았을 겁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같은 말을 두고도 이렇게 뜻이 다르면 참 이상하구나 하며 거리감을 느껴야 할 텐데, ‘빠구리’는 전혀 그렇지 않고 살가운 느낌이 들면서 정다워지니 이래서 오히려 이상한 노릇입니다.

아마 비 그친 가을날이라서, 바위는 더욱 시커멓고 물줄기는 더욱 시퍼렇고 단풍은 더욱 시뻘건 가을날이라서, 해야 할 일 다 때려 치고 훌쩍 떠나, 전라도식으로 ‘한 빠구리 뻐근하게 잘 치고 싶은 날’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국민학교 때 첫사랑을 불러내어 정겹게 손을 잡고 단풍숲 오솔길을 자꾸자꾸 걷고 싶습니다.

-------------------------------------------------

<유모어 뱅크>는 자기네 편집 방침 '에로빵빵'에 걸맞은 부분만 도려내어 실었습니다. 원문이 담고 있던 취지는 완전 사라졌습니다. 지역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말을 입에 넣고 굴리는 즐거움은 싸그리 들어내고, 그냥 천박한 경험담에 머물도록 바꿔버렸습니다.

제가 표절을 당하기는 이번까지 두 차례입니다. 203년 2월 15일치 우리 <경남도민일보>의 '생각이 있는 풍경'에 올린 글과 사진이 처음 도둑맞았습니다. '농민들의 진솔한 울분'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처음 표절 당한 사진입니다.

산청군 시천면 내공마을 공동창고에는 농민들이 힘모아 중국과 미국을 몰아내는 그림이 있다. 처음 찾은 99년 봄에도 내공마을 공동창고는 이미 쓸쓸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덕천댐이 들어서니 마니 하는 때라서 수몰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림을 보면 그야말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밝은 표정으로 웃으면서 미국과 중국의 값싼 수입 농산물을 쫓아내고 있다. 조그만 아이는 고무줄로 만든 새총을 들고 돌멩이를 핑핑 날리는 듯하다.

미국을 상징하는 샘 아저씨는 전형적인 중국 왕서방에게 가려버렸다. 오른쪽 아래에는 ‘중공산 갈분’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절실한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나 보다.

92년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는 쌀 수입만큼은 반드시 막아내겠다고 공약했다. 많은 사람은 그 공약과 함께, 당선된 뒤에 헌신짝처럼 공약을 버린 사실도 함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농촌은 지금 경쟁력 논리와 공산품 수출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논리에 밀려 죽어가고 있다.

사정은 벽그림과 반대로 가고 있다. 중국산 마늘이 그나마 남은 농민들의 가슴을 따갑게 한다. 미국산 밀가루는 여전히 위세 당당하고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은 과일 농사를 폐농으로 몰고갈 태세다.

내공 마을에는 지난 해에 이어 올해도 ‘유치원 원아모집’ 공고가 붙지 않았다. 마을에 젊은이가 없다 보니 유치원 갈 아이가 있을 턱이 없다.

희미하게 빛 바랜 웃음을 흘리는 2001학년도 원아 모집 포스터는 사진 바깥 공동창고 저쪽편에 붙어 있다.

당시 제 글과 그림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도둑질한 주체는 산청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어떤 주간지였습니다. 그래 제가 보고는, 황당하기는 지금과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제가 글과 그림을 통해 알리고자 했던 바가 지역 주민들께 한 번 더 전달된 셈이라 할 수도 있으니 참자 하고 말았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유모어 뱅크>에 실린 글과 그림

이번은 사정이 다릅니다. 글의 취지가 크게 망가졌을 뿐 아니라 <유모어 뱅크> 성격에 비춰 볼 때 아무리 양보해도 '상업적 악용'이라고밖에 달리 볼 수가 없습니다.
<노처녀의 첫날밤>, <일본인 여비서>, <어느 밝히는 여자의 기막힌 일기> 따위에 끼여서, 어떻게든 색탐하는 눈길을 한 번이라도 더 잡아당기는 역할만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고소를 하겠습니다. 저작권법 위반으로 말입니다. 법에 따르면 표절은 최대 5년 이하 징역형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글의 원래 취지를 지워버리고 많은 사람들 눈요기감으로 삼은 데 대해 책임을 묻겠습니다. 제 글이 그리 품위가 있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야말로 아무 생각없이 갈겨쓴 수준으로 떨어뜨린 책임도 같이 묻고 싶습니다.

아울러 손해배상 청구도 하겠습니다. <유모어 뱅크>가 제 글을 실음으로써 얻은 이익이 있다면 모조리 다 받아내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남의 글 따위는 슬그머니 베껴써도 되고 크게 나쁘지는 않다는, 잘못된 통념-거짓말쟁이인 이명박 대통령 아래이기는 하나, 이번에 장관 후보로 지명된 이들도 논문 표절이 들통났을 때 큰 잘못이라 여기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을 정도니 심각하기는 심각합니다.-을 조금이나마 바로잡고 싶습니다.

김훤주(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 지부장)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