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허명 집착하는 사회, 천박한 명예상품들

기록하는 사람 2008. 12. 11.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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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의 일이다. 우리 신문에 유망 중소기업체 사장 한 분의 성공사례가 인터뷰 형식으로 소개됐다.

그날부터 그 회사에는 전화가 줄을 잇기 시작했다. 격려나 칭찬, 안부, 문의전화 같은 게 아니었다. [××인물사전]에 당신의 사진과 경력을 싣겠다, [○○연감]을 보내드리겠다, '××경영대상'을 드리겠으니 이력서와 신청서를 보내달라는 따위의 요청이 대부분이었다.

좋은 일 아니냐고?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당신은 참 순진한 거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인물사전]에 실리면 기본적으로 서너 권은 구입해야 한다. 한 권의 가격은 기본적으로 30만 원이다. [○○연감]도 그 정도 가격이다. '××경영대상'은 신청비나 심사비, 홍보(광고)료 등 별의별 명목으로 최소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요구한다.

그런 전화뿐 아니었다. 심지어 자선단체로부터 아예 노골적으로 후원금을 넣어달라는 요구에서부터 수많은 잡지사의 정기구독 요청에 시달리기도 했다.

[월간 ○○인물]이라는 잡지로부터는 4페이지에 걸쳐 인터뷰를 실어 드릴 테니 그 인터뷰가 실린 잡지 300권을 사달라는 제의를 받기도 했다. 대개 조그만 개인병원의 환자 대기실에 보면 그 병원 원장의 인터뷰나 병원 소개기사가 총천연색으로 실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지들이 놓여 있다.

그 잡지들은 모두 그런 식으로 '돈을 받고 기사와 지면을 팔아먹은' 것으로 보면 된다.

어쨌든 그 중소기업 사장은 그런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그럼에도, 막무가내로 두꺼운 양장본 책들이 배달됐다. 그 중 하나는 '한국조사기자회 경남지부'에서 보낸 [뉴스연감]이었다. 내가 알기엔 '한국조사기자회'는 있지만, 그 단체의 경남지부는 없다.


그 책도 조사기자회에서 펴낸 건 맞는 것 같은데, 판매는 대행업체에서 한다. 아니 판매뿐 아니라 책의 기획에서부터 인쇄까지 그런 대행업체에서 맡는 경우가 많다. 단체는 이름만 빌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판매를 맡은 직원은 절대 대행업체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언론단체의 이름을 팔거나 기자를 사칭한다.

이런 단체뿐 아니라. 수많은 신문사나 통신사에서 펴내는 책들도 다들 판매대행업체를 끼고 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해당 언론사 이름과 기자를 사칭해 은근히 압력을 넣는다. 다짜고짜 택배로 책을 먼저 보내 놓고 입금을 요구하는 일도 흔한 일이다. 그러면 대부분 기업이나 관공서, 지방의원 등은 '후환'이 두려워 보험 넣는 심정으로 책값을 입금하고 만다.

문제는 판매를 의뢰한 언론사나 언론단체들이 그걸 알면서도 묵인한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책이 잘 팔리면 자기들에게 떨어지는 수익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언론사의 이름을 건 사기행위나 다름없다.

더 치사한 것도 있다. 어렵게 장사하는 식당까지 찾아가 '맛집'으로 소개해주겠다며 돈이나 광고를 요구하는 신문도 있다.

'××대상'이나 '○○가 선정한 올해의 히트상품' 같은 '상 매매' 행위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문제가 된 '존경받는 대한민국 CEO 대상'도 그랬지만, 대개 언론사나 언론관련 직능단체의 이름으로 정치인이나 자치단체장, 기업체에 주는 상은 99%가 그런 거라고 보면 된다.

나는 이번 '상 매매' 파문에 서울지역 일간지들이 한결같이 침묵을 지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심지어 교수님들의 학술단체인 무슨 무슨 학회에서도 이런 '상 장사'를 한다. 얼마나 다양한 '상 매매' 상품이 있는지 궁금하다면 경남도민일보의 이 페이지(http://www.idom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224733)를 클릭해보시라.

한국에 유독 이런 '명예 상품'이 많은 까닭은 뭘까. 내가 보건대 그건 우리나라가 워낙 '허명(虛名)에 집착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학력위조' 파문도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그때는 한국의 모든 언론이 경쟁적으로 유명인사들의 학력위조를 비판했지만, '상 매매'에 대해서는 애써 못 본 척, 못 들은 척만 하고 있다. 바로 언론 스스로 주범 내지 공범이기 때문이다. 검찰과 경찰도 학력위조에 대해선 수사까지 했지만, 이번엔 조용하다. 경찰청장까지 그런 상을 받아서일까.

참으로 천박한 사회의 천박한 상품이다.

※첫 보도 : '존경받는 CEO 대상'은 돈주고 받는 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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