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로드킬, 인간 문명의 끝간 데 없는 잔인함

김훤주 2008. 12. 7.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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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6일 뜻하지 않게 대구 옆 경산에 있는 안심습지를 다녀왔습니다. ‘뜻하지 않게’라 한 까닭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강의’를 하러 갔을 뿐인데 일이 안심습지를 둘러보도록 풀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번 ‘강의’는 제게 수수께끼입니다. 환경운동연합에서 지난 9월 섭외가 들어왔는데, 왜 제가 꼽혔는지, 저를 추천한 사람이 누구인지, 강의 주제가 무엇인지 따위를, 다녀온 지금도 제대로는 알지 못하는 상태랍니다.

제가 말씀드려야 하는 대상도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가서 보니까, 저보다 습지나 생태에 대해 몇 배는 더 잘 아는 40대와 50대 여성 분들이셨습니다. 풀이나 새 이름을, 저랑은 견줄 수도 없으리만치 잘 아시더라고요.

멀리 보이는 저 철길에서 이 사고가 났습니다.


어쨌거나 여기서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장면을 보고 말았습니다. 고가(高架) 철로(鐵路)에서 로드킬을 당한 너구리였습니다. 끔찍했습니다. 철로에서 짐승이 치여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저는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진에서 앞쪽이 원래 머리가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 검붉은 핏자국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날 길라잡이를 해 주신 이상원(마흔여섯인 저보다 훨씬 살갗이 탱글탱글했는데 나중에 쉰여섯이라 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만) 선생님께서, 논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 너구리를 보더니 바로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옆에 있는 고가 철로에서 떨어진 녀석입니다. 콘크리트 다릿발을 타고 올라갈 수는 없으니까, 저 쪽 컨테이너 하우스 지붕 같은 데서 기어올랐을 것이고, 가다가 기차에 받혀 이렇게 떨어졌을 겁니다.”

뒷다리는 사진 위쪽 가운데 그림자 속에 있고, 앞다리는 오른쪽 아래 있습니다.


이 선생님께서는 가까이 가 보기도 전에 “아마 머리가 없을 것”이라 하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머리가 통째로 달아나고 없었습니다. 아니 달아났다기보다는 기차 달리는 속도에 가루가루 깨어져 온통 흩어져 버렸겠지요.

짐승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망이라도 쳐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을 올리지 말까 여기기도 했지만, 아무 잘못도 없이 죽어간 너구리의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리 합니다.

(물론 잘못이 있으면 죽어도 된다는 뜻은 여기에 조금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또 이런 글 올리면 “너 잘 났다. 잘난 너는 기차 안 타고 자동차 안 타냐?”는 비아냥이 따라다님도 알지만, 그런 정도는 달게 받겠습니다.)

짐승이 많은, 그래서 로드킬이 일어날 개연성도 높은, 이런 습지에 철길을 내는 까닭은, 보상 비용이 안 들거나 들어도 조금뿐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다른 생명에 대한 인간의 배려 수준이 이렇다는 얘기입니다.

돌아오면서, 지율 스님을 생각했습니다. 스님은 이런 말을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옛날 스님들은, 땅바닥에 기어다니는 벌레를 조금이라도 덜 밟으려고, 짚신을 아주 성기게 삼아 신었답니다.

아울러 1997년에 썼던, 그리고 이듬해 저를 비롯한 여섯이 공동으로 펴낸 시집 <사람 목숨보다 질긴>에 실리기도 했던, ‘로드킬을 불러온 이 잔인한 문명에 항의’하는 시, ‘길은 죽인다’도 곁들여 봅니다.



길은 죽인다

걷지 않고 살피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고
달려가는 길이라면
사람만 죽이지는 않는다

으깨진 뼈 조각조각
갈아 뭉갠 위로
갈아 뭉개뭉개
너덜너덜해진 가죽
껍질 벗겨져 허옇게 도드라진
머리통 피는 사방으로 튀지 않아
한 쪽으로 쏠려 검붉게 흩어져 있는데
죽은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가잘 데 없이
끝도 없이 뻗은 길
까닭도 모르고 튼튼히 포장된 도로는
산과 밭 밭과 논 논과 내 내와 마을
마을과 마을을 가르고
그 가르는 길을 가르면
길이 죽인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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