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언론

시민단체 토론회에 시민은 없었다

김훤주 2008. 3. 13.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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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에서 토론회가 있었습니다. '바람직한 18대 총선 보도를 위한 토론회'였습니다. 2008 총선 미디어 연대가 주최하고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주관했습니다.

발제는 셋이 했습니다. 인제대 언론정치학부 김창룡 교수가 '선거방송심의 개선 방안'을, 전북민언련 박민 정책실장이 '신문 방송의 과거 선거보도 경향과 과제'를, 한서대 신문방송학과 이용성 교수가 '2008년 총선 모니터 개선 방안 모색'을 맡았습니다.

토론은 저를 비롯해 한국PD연합회 김재용 정책위원, 17대 대통령선거 선거방송심의위원회 성유보 위원, 대전민언련 이기동 방송팀장, 경남대 안차수 교수까지 다섯이 나섰습니다.

아주아주 썰렁한 토론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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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 장면. 왼쪽 구석에 제가 있습니다요.(출처 PD저널)

토론회는 서울 한복판 한국언론재단 건물 7층 레이첼카슨룸에서 열렸습니다. 자리는 모두 마흔이 살짝 넘을 정도는 되지 싶어보였는데, 절반도 차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가운데 너댓은 '매체 관련 보도 매체'(meta-media라고나 할까요?) 종사자로 보였습니다. 이밖에 민언련 식구도 몇몇은 있었겠지요.

이런 토론회에 와서 봐야 할, 이번 총선 보도 일선에서 뛰어다닐 기자나 PD는 방청객 가운데 거의 없는 것 같았습니다. 관련 학문 연구자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발제나 토론을 하려고 앞에 나와 앉아 있는 사람이 여덟이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이 스물이었습니다. 이 스물은, 나중에 때에 따라서는 열둘로 줄어들기까지 했습니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구 1000만이 넘는 서울에서, 우리나라 인구 절반이 모여 있다는 수도권 한복판에서 토론회를 하는데 이렇게까지 사람을 모으지 못할 수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신문방송 관련 대학만 해도 적어도 수십 개는 될 테고(소속 학생도 많겠지요?), 나름대로 저마다 이름을 뽐내는 신문사나 방송사도 꽤 많은데 말입니다. 그런 데서 한 명씩만이라도 왔더라면 토론회장이 미어터지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총선미디어연대 참여 단체 57곳서 한 명씩만 왔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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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008총선미디어연대 홈페이지

조중동이 무시하는 까닭을 충분히 알겠더군요. 주최 단체인 총선미디어연대는 언론노조, 기자협회, 참여연대, 민언련, 여성민우회, 경실련, 기독교사회연구원, 민변, 전국연합 등등등 전국 57개 단체가 모여 지난 2월 26일 결성한 조직입니다. 이번 총선을 두고 매체들이 보도를 제대로 하는지 여부를 감시하는 데 목적이 있는 한시(限時) 조직입니다.

그런데도 고작 20명밖에 참여하지 않았다니, 이러니까, 제가 조중동 같아도 '그 까짓 따위들', 하면서 아예 눈밖에 내놓고 말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비유하는 말로 이르자면, '찻잔 속 태풍' 아니겠습니까? 아니, 사실로 본다면, '찻잔'도 지나치고 '태풍'도 지나칩니다. 제 느낌으로는 '소줏잔'과 '미풍'도 분에 넘칩니다.

토론회 같은 행사가 이러니 조중동도 민언련이나 총선보도감시를 물로 보고, 조중동이 물로 보니까 반대편에 있는 한경서(한겨레+경향+서울신문) 같은 매체들도 애써 다루지 않습니다.

참여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보도하는 매체도 얼마 안 됩니다. 이른바 매체 관련 매체들만 토론회를 다룹니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일간지'들은 이날 토론회를 전혀 의미있게 다루지 않았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취재 당하는 처지에 서 봤다는 점은 보람

어쨌거나 취재 당하는 처지에 서 봤다는 점은 보람이었습니다. 여태까지는 기자로서 기자를 봤다면, 이날은 취재 대상으로서 기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방청석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두드리던 사람이 너댓 있었습니다. 한둘은 발제가 끝나자 바로 나가거나 자판을 그만 두드렸습니다. 나머지 몇몇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토론자로 참가한 저는, 나가는 그이들이 못내 섭섭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공부해서, 발제에는 못 미치지만 토론할 내용을 준비했고, 들을 값어치가 조금은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준비한 내용을 그이들이 듣지 않고 그냥 가는 모습에 대해, 제 처지에 선다면 어느 누구라도 그리 여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도 물론 먼저 자리를 뜬 이들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저 또한 현장에 있을 때, 취재 일정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하나뿐이면 그냥 있을 때도 있었지만, 두셋 겹치면 발제 끝나지 않았을 때라도 거리낌없이 나가곤 했거든요.

게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 어떤 경우는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더 이상 들을 것이 없겠군.' 하는 표정을 은근히 지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해보니 이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없을 정도입니다.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다음에 현장에 나가면, 끝까지 남아서 챙겨야겠다. 아니, 발제는 자료집에 잘 담겨 나오지만 토론 내용은 들어 있지 않을 때가 많으니까, 오히려 발제보다는 토론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꾸면 어떨까? 

어쩔 수 없어 도중에 자리를 떠야 하는 경우에는, 미안한 표정을 (일부러라도) 잔뜩 짓고 살금살금 기어서 나와야지! (제가 이날 토론한 내용은 이 글 취지와 어울리지 않아 넣지 않습니다.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김훤주(전국언론노조 경남도민일보 지부장)

2008/01/19 - [지역에서 본 세상] - 시민단체도 피아(彼我)식별이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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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 기자의 고민과 삶을 담은 책. 20여 년간 지역신문기자로 살아온 저자가 지역신문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기자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풀어낸다. 이를 통해 서로 비슷한 고민을 가진 지역신문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촌지, 살롱이 되어버린 기자실, 왜곡보도, 선거보도 등 대한민국 언론의 잘못된 취재관행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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