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과학 선생들한테 된통 당한 국어 선생

김훤주 2008. 11. 30.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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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가 좋아하는 소설가는 아닙니다만, 김훈이 쓴 소설 <칼의 노래>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부역을 나온 백성들이 일을 끝낸 뒤에도 돌아가지 않고 남아 이순신 장군에게 선물로 줄 칼(환도)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 대장장이 백성들이 검명(劒銘)까지 새기겠다 나서는 바람에 장군이 一揮掃蕩일휘소탕 血染山河혈염산하, 라고 글을 적어주기까지 합니다.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백성들 장군에 대한 믿음과 장군을 받드는 마음과 왜적을 물리치자는 간절한 소망과 이순신 장군의 굳건한 충심이 도드라져 보이는 국면입니다.

김훈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 때, 나는 진실로 이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염(染)하고 싶었다. 김수철은 글씨를 말아들고 물러갔다. 새 칼은 나흘 뒤에 왔다. 칼집에 자개를 박아 용무늬를 새겨넣었고 박달나무 손잡이에 삼끈을 감았다. 칼을 빼자 햇빛이 튕겨져 나갔다.”

‘칼을 빼자 햇빛이 튕겨져 나갔다.’ -장군이 백성들에게서 선물 받은 칼을 빼어든 장면입니다. 소설가라면, 보통 여기에서, 갖은 말들을 다 보태 백성들 생각과 장군의 의지가 합치되는 그런 보람이랄까에 대해, 잔뜩 적어 넣었을 것입니다.

2002년 2월 양산여고 교정에서 찍은 이헌수 사진.

김훈은 그리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제 후배 이헌수가 반했답니다. 이헌수는 양산여고 국어 선생입니다. 군말 군소리 다 없앤 간결함입니다. 칼과 햇빛 두 이름씨와, 빼다와 튕겨지다 두 움직씨만을 담은 단 한 문장으로, 그 장한 장면을 남김없이 훌륭하게 갈무리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을 두고 몇 차례나 감탄을 하다가, 학교 도서관에 동료 물리 선생이 놀러 왔기에, “정말 멋지지 않으냐?”고, 동의를 구하는 물음을 던졌답니다. 그런데 그 돌아온 대답이라는 것이, “그거, 당연한 일이야.”였답니다.

물리학으로 볼 때, 빛은 파동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빛이 칼과 같은 금속 물체에 부딪히면 튕겨져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고, 그렇기에 그것은 당연한 사실의 적시일 뿐 무슨 대단하고 색다른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저는 어제 양산에 갔다가 이헌수를 만난 자리에서 이 얘기를 듣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면서 한참 웃었습니다. ‘문학의 표현’이 ‘과학의 서술’로 영역을 옮겨가면 이리도 달리 읽힐 수 있는 노릇이구나. 하하, 하하하.

2.
이번에는 생물 선생한테 당한 사연입니다. 이헌수가 잇달아 해 준 얘기입니다. 이헌수는, 생태주의자인지 아닌지는 제가 모르지만, 어쨌든 자연 생태계를 참 아끼는 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자전거를 타고서 학교와 집을 오가고 있기까지 하고요.

그러니까 양산천 제방 안쪽 어디쯤이 됐겠는데, 가다 보니까 풀에서 피어난 꽃들이 아주 예뻐 보였답니다. 저는 풀들 이름을 잘 모르지만 후배 이헌수는 학교 선생이니까, 듣고 보고 해서 아는 풀꽃들 이름이 많았나 봅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주섬주섬 그것들을 입에 올리며 “참 보기 좋다. 정말 아름답다.” 그랬다지요. 그랬더니 옆에 있던 누군가에게서 이리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답니다. “세상에, 남의 생식기 보고 예쁘다는 말이 나오나?”

꽃이 식물에게 생식 기능을 하는 데 견줘서, 그냥 웃으려고 한 번 해보는 얘기였겠지만, 그리 말한 이가 바로 생물 선생이어서 느낌이 좀 달랐다고 그럽니다. 자기 하는 일에 따라서, 사물을 이처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구나, 싶었겠지요. 하하.

3.
이러고 나니까 다른 후배 생각이 나는데요. 이 친구는 자기 배로 낳은 아들 녀석의 자지(그러니까 생식기)를 보고 아주 예쁘다고 제게 자랑을 한 적이 있습니다. 10년도 더 전에 그 녀석이 두 살이나 세 살 정도일 때 일어난 일입니다.

바지를 벗겨 아들 자지를 보이게 하더니 “참 정말 꽃봉오리 같아요. 예쁘지요?” 이랬습니다. 그럴 터입니다. 생식기라 하면 숨겨야 하고 더러운 무엇으로 여기는 인식은, 잘못된 우리 문화가 씌운 더께일 뿐이지, 실제 생식기는 아주 아름다운 무엇일 것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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