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역사에 대한 부관참시, 막아야 합니다

기록하는 사람 2008. 11. 23.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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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에 경남 진주와 함양의 민간인 집단학살 희생자 유족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유족 중 한 분의 "저는 일곱, 여덟 살 때까지 원래 모든 집에는 아버지가 없는 줄 알고 자랐습니다"는 말이 귓가를 맴돌고 있습니다.

4·19혁명 이후 46년만에 다시 찾아온 집단학살(Genocide) 진상규명이 2년만에 또다시 무산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에 대해 유족들은 "희생자를 세 번씩이나 죽이는 일이며, 두 번째 부관참시나 다름없다"며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지난 20일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의 대표발의와 한나라당 임태희 정책위 의장 등 14명이 공동서명한 과거사 관련 14개 기구 통폐합 법안 때문입니다.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에서 발굴된 민간인 집단학살 희생자 유골. 두개골을 관통한 총상의 흔적이 선명하다. 발견된 탄피는 모두 카빈소총의 그것이었으며, 어린아이와 여자의 유해도 나왔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을 맡고 있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안병욱 위원장(장관급)과 김동춘 상임위원(차관급)과 비상임 위원들은 모두 교체되거나 자리가 없어지게 됩니다. 통폐합되는 다른 위원회도 마찬가지죠.


대신 과거사 청산과 집단학살 진상규명에 반대해온 친한나라당 성향의 인물들이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겠죠.

전국적으로 최소 수십만~최대 100만 명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은 1960년 4·19혁명 직후 국회 조사특위에서 1차 진실규명에 나섰으나, 이듬해 5·16 군사정권에 의해 무산된 바 있습니다. 당시 박정희 쿠데타정권은 유족회 간부들을 구속하고 발굴된 유해마저 다시 파헤쳐 유기했으며, 유족들이 세운 비석도 파괴해버렸습니다.

유족들은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의 행위가 '1차 부관참시'였으며, 이번에 또 진실규명이 무산되면 '2차 부관참시'가 된다며 반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화해위의 한 조사관은 "현 정부 출범 이후 교체된 위원들로 인해 지금도 이미 활동에 많은 제동이 걸리고 있다"면서 "한나라당의 통폐합안은 사실상 진실규명 활동을 중단시키고 유명무실한 기구로 만들기 위한 수순"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상 기능상실 위기에 처한 진실화해위원회의 회의실.


지난 21일 진주를 찾은 진실화해위 김동춘 상임위원도 "(한나라당이 예산절감과 업무 효율성을 통폐합 이유로 내세우고 있지만) 기구를 다시 세팅하고 업무를 숙지하는데 최소 6개월이 걸리는 것 등을 감안하면 시간이나 비용이 더 들게 된다"며 "대승적으로 보면 지금 이 문제를 풀고 가는 것이 이명박 정부에도 플러스가 됐으면 됐지 손해볼 일은 아닐텐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했습니다.


보도연맹 학살로 아버지를 잃은 민간인학살 진주유족회 강병현 부회장은 "나는 7·8살 때까지 원래 아버지는 없는 것인 줄로 알고 컸다"면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줘도 시원찮을 판에 불법학살을 해놓고도 또다시 진상규명마저 무산시키려는 게 과연 국가가 할 일이냐"고 분개했습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상임대표 이이화·김영훈·임태화)도 성명을 냈습니다. 이 단체는 성명에서 "진실화해위는 자체 사안만으로도 예산과 조사인력 부족 등으로 신청사건의 30%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고, 각 위원회들도 각기 입법목적과 규정에 따라 국회가 승인한 예산범위 내에서 어렵게 활동하고 있다"면서 "결국 이는 피해자와 유족들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모독하며 과거 국가폭력을 은폐하려는 부당한 횡포"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명박 정권의 무대뽀와 일방통행식 정치가 워낙 전방위적이다 보니, 이번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무산위기 역시 세간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한나라당에 의한 통폐합 대상 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위원회 △6·25전쟁중 적 후방지역작전수행 공로자에 대한 군복무 인정 및 보상위원회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위원회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위원회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삼청교육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위원회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위원회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위원회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체결 이후 납북피해자의 보상 및 지원위원회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한센인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생활지원위원회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

민간인학살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의 기자회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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