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폐허로 방치된 한 혁명가 하준수의 생가

기록하는 사람 2008. 11. 23.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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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보다 더 불꽃같은 혁명가의 삶을 살다 간 하준수(1921~1955)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게바라(1928~1967)보다 더 일찍 태어나, 더 일찍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는 미 군정 시절 유격대의 작전명 남도부(南道富)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함양군의 천석꾼 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진주중학교(현 진주고) 재학시절 일본인 교사를 폭행해 퇴학당한 뒤 일본으로 유학해 중앙대 법대에 진학했습니다.

졸업반 시절 일제의 학병 징집을 거부하고 고향으로 숨어든 그는 지리산에서 동지 70여 명을 규합, 보광당이라는 항일 무장게릴라 부대를 창설합니다. 이른바 우리나라 최초의 파르티잔이었습니다.


체 게바라(왼쪽)와 하준수. 게바라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하준수를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그는 해방 후 몽양 여운형과 함께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군대 창설을 위해 노력했으나 미 군정에 의해 좌절당하자 다시 지리산에 들어가 미 군정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지휘합니다. 이 때의 작전명이 남도부였고, 그 때부터 그는 하준수라는 본명보다 남도부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 중장으로 참전했으나 1953년 휴전 후에도 남한에 남아 태백산과 일월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다 1954년 부하의 밀고로 대구에서 체포돼 1955년 김창룡 특무대장의 심문을 받고 총살당했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 네 살이었습니다.

부잣집 아들로 안락한 삶을 거부한 채 해방 이전엔 무장투쟁으로 일제에 맞섰고, 해방 후엔 미 군정에 게릴라전으로 맞섰으며, 단독정부 수립 후엔 이승만 정권에 인민군 중장과 파르티잔 지휘관으로 맞서다 간 그의 짧은 삶은 어쩌면 체 게바라보다 훨씬 치열했습니다.

하준수의 생가를 보존하자고 주장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우리나라가 이념 대립만 없는 사회라면 게바라보다 더 유명한 혁명가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게바라를 아는 한국의 젊은 사람들 중에도 하준수를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의 고향은 경남 함양군 병곡면 도천마을입니다. 지금도 그의 생가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바뀌었습니다.

함양군 병곡면 도천마을의 하준수 생가.


도천마을 역시 한국전쟁 때 좌-우익 양쪽으로부터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곳입니다. 하지만, 좌-우 어느쪽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든 관계없이 그의 고향마을에서 하준수를 나쁘게 말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부잣집 아들 출신 좌익이긴 했지만, 해방 후에는 곳간을 열어 가난한 이들에게 쌀을 나눠줬을뿐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해꼬지를 하지 않은 따뜻하고 높은 인품의 소유자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른 키 두 배가 넘는 담을 훌쩍 뛰어넘을 뿐 아니라 축지법을 쓰는 전설적인 무술의 고수로 기억하는 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향사람들에게도 신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어머니 집 쪽에서 본 하준수 생가.


그의 생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폐가로 방치되고 있죠.


이미 지붕의 한쪽 귀퉁이는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저절로 내려앉을 것 같습니다.

하준수의 집은 한 채가 아니라 대여섯~일곱 여덟 채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다른 분이 살고 있는 인근의 집도 원래는 하준수 작은어머니의 집이었다고 합니다.

이미 왼쪽 지붕은 허물어져가고 있다.

이들 집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건축물로 문화재적 가치도 높습니다. 하지만 전설적인 좌익 게릴라 총사령관의 집이어서인지 행정관청에서도 전혀 보존에 관심이 없는 듯 합니다.

좌와 우를 떠나 한국 현대사에서 전설적 인물이었던 그의 집을 보존하자고 주장하면 아마도 비난하는 사람이 적지 않겠지요? 하지만 허물어져 가는 그의 집을 보면, 점점 묻혀져 가는 현대사의 진실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하준수 집안 소유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 역시 폐가로 남아 있다.

하준수의 작은 어머니가 살았던 집.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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