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10월 유신에 얽힌 마지막 기억

김훤주 2008. 10. 3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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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은, 60년대에 태어난 우리에게는 선험(先驗)이었습니다. 경험 이전에 주어진 무슨 당위 같은 것이었습니다. 국민학교 때는 동요 산토끼 가락에 “시월의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무슨 이런 가사를 붙여 부르곤 했습니다.

특히 여자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할 때 많이 불렀고요, 무슨 투표를 할 때마다 제가 살던 경남 창녕군 창녕읍 시골마을까지 어떤 긴장이 느껴지는 분위기였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출 같은 것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어른들이 목소리 낮춰 수군대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큰형은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10월 유신 헌법을 제정해 영구 집권을 하려 했을 때 대학 전자공학과 3학년이었고 79년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대학원에 다니면서 대학에 강의도 나갔습니다.

큰형과 아버지는 “이런 이야기 바깥에 나가서는 하면 안 된다.” 하시면서 말씀들을 주고받았습니다. 주로 권력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습니다. 누구는 박정희 대통령한테 어떻게 말했다가 정강이를 까였고 누구는 중정(중앙정보부)에 곧바로 끌려갔다…….

저는 안 듣는 척하면서 어른들 말씀에 귀를 기울이곤 했습니다. 물론 하지 말라는 얘기라 해서 바깥에서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저도 큰형이나 아버지처럼, 조심스럽게, 사방 눈치를 살피면서, 친구들에게 ‘이렇다더라.’ 얘기를 해댔지요.

독재자 박정희 흉상

그런 유신이, 1979년 10월 26일 밤에 갑작스레 쓰러졌습니다. 박정희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으나, 어른들 얘기도 좀 듣고 작은누나 덕분에 <창작과 비평>이나 <사상계>도 뒤적인 적이 있는 저는 냉소를 머금었습니다.

유신이 자빠진 10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31일, 제게 남은 유신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얇디얇은 사람 인심과 관련돼 있습니다. 저는 당시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대구에는 다른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입시학원이 여럿 있었습니다.

가장 크다는 학원 가운데 하나가 이름이 <유신학원>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동성로 중심가에서 대봉동 나가는 들머리에 있었는데 행여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이 <유신학원>이 박정희 쓰러지기 전에는 한글로 적혀 있었습니다.

짐작건대는, 박정희 10월 유신에서 따왔다는(그러니까 찬양한다는) 느낌을 충분히 줄만한 이름이었습니다. 당시 박정희는 또 한글 전용까지 밀어붙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것이 박정희 쓰러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뀌었습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지나가거나 아니면 걸어서 돌아다니던 한 어름에, 제가 이 학원 이름이 바뀐 사실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눈여겨보지도 않았고 어떤 의미도 두지 않았겠지만, 제 가슴에는 이것이 아주 날카롭게 찌르며 들어왔습니다.

한글로 쓰여 있던 <유신학원> 간판이 중국글로 바뀌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10월 유신 할 때 그 ‘유신(維新)’이 아니고, 오로지 유(唯)에 믿을 신(信) 해서 유신이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도 “야 참, 이건 아닌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학원 주인이 10월 유신이 옳다는 소신이 뚜렷했기 때문에 학원 이름을 그리했으리라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뒤늦게나마 이름을 바꾼 목적이, <유신학원>이 10월 유신이나 박정희하고는 전혀 상관없다고 발뺌하는 데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세상 인심 참 야박하구나……, 사람 죽은 지 며칠도 안 돼 저리 이름까지 갈아 치워 버리다니……,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노릇이 바로 아침 이슬 같은 권력이구나……. 어쩌면 제가, 너무 일찍, 세상사는 이치 한 끝자락을 엿보고 말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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