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언론

시골마을 이장들이 집단사퇴한 까닭

기록하는 사람 2008. 3. 6.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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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순박하고 점잖은 어른들이었다.

대개 상당한 인격자로 알려진 분 중에도 자기와 직접 이해관계가 걸리면 이성을 잃고 언성을 높이는 사람이 많다. 신문사에 있다 보면 특히 그런 분들을 자주 보게 된다.

보도된 내용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자기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앞세우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의령군 칠곡면에서 온 어르신들이 경남도민일보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하지만, 그날 경남도민일보를 찾아온 의령군 칠곡면의 어르신들은 달랐다. 신문사 앞에서 미리 준비한 손팻말과 펼침막을 가지런히 든 채 기자회견문을 낭독한 어르신들은 자율적으로 5명의 대표단을 뽑아 편집 책임자와 면담을 요청했다.
 
어르신들의 신문사 항의방문
 
방문 계획도 공문을 통해 사전에 전달해왔다. '귀사가 보도한 2008년 2월 14일 자 기사 <자굴산골프장 주민설명회 간신히 마무리>와 관련해 아래와 같이 편집국장을 방문코저 합니다'라는 정중한 문구와 함께 방문 일시와 방문자, 방문처, 방문 이유 등이 적혀 있었다.

그날따라 편집국장이 없는 날이어서 담당 부장인 내가 그분들을 만났다. 말씀은 논리적이고 차분했다. 무리한 정정보도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정확하고 치우침 없이 취재·보도해달라는 것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골프장이 들어설 곳은 마을 한 가운데 자리잡은 자굴산 자락. 골프장은 사진 왼쪽 자굴산과 마을의 접점에서 시작해 뒷산까지 이어진다. 가깝기로는 마을에서 불과 150m 떨어진 곳에 골프장이 들어서는 것이다. /경남도민일보 진영원 기자


현지에 기자를 보내 사실관계부터 확인에 들어갔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적어도 2008년 2월 13일 의령군 칠곡면에는 기본적인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없었다. 탱크와 총만 없었다 뿐이지, 전두환 일당의 12·12쿠데타를 방불케 했다. '주민설명회'에 들어가려는 '주민'들을 검은 점퍼를 입은 공무원들이 철벽처럼 막아냈다. 이 과정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밀리고 밟혀 119구급차로 후송되기도 했다.

'주민'의 출입을 막은 '주민설명회'에는 의령군청 버스를 타고 온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공무원들의 삼엄한 보호(?) 속에 참석했다.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이날 상황을 동영상으로 찍은 김은철(42) 씨는 "설명회 2시간 전부터 공무원들이 1층부터 2층 회의실까지 빼곡히 들어앉아 출입을 통제했다"며 "그러나 군청 버스를 타고 온 민간인들이 설명회장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는 일사불란하게 길을 터줬다. 마치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주민설명회장으로 오르는 계단을 막아선 공무원들.


이처럼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주민설명회를 마친 의령군은 다음날 바로 서류를 꾸며 '주민 의견수렴 절차를 거쳤으니 골프장 허가를 내달라'는 공문을 경남도에 제출했다. 속전속결, 일사천리였다.

황당한 일을 당한 주민들은 분개했다. 칠곡면 14개 마을 이장들이 이런 부당한 일에 항의하는 의미로 사퇴했다. 새마을지도자와 부녀회장도 모두 사퇴했다. 내조마을 전병진(72) 이장은 "칠십 평생에 이런 일은 처음 겪는다"며 치를 떨었다. 나도 국회의 날치기 의안처리는 봤지만, 날치기 주민설명회는 처음 들었다.

하지만, 의령군의 담당 과장은 "주민들과는 대화도 안 되고 접근도 안 된다. (공무원은) 마을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런 보고를 들으면서 오싹한 두려움을 느꼈다. 적어도 80%가 넘는 주민들, 그것도 70~80대에 이르는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똘똘 뭉쳐 반대하고 있는 일에 대해 공무원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니…. 만일 대통령이 특정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그 지역) 국민과는 대화가 안 된다"고 말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물론 주민들이 골프장으로 인해 입을 피해를 과도하게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주민을 설득해야 하는 건 공무원의 의무요, 도리다. 국민과 말이 안 통한다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건 군사독재정권이나 하는 일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돌멩이가 일어서 외칠 것
 
나는 김채용 의령군수가 이런 무지막지한 일을 지시했다고는 믿을 수 없다. 적어도 그분이 9급 공무원에서 시작해 경남도 행정부지사에 이르기까지 보여줬던 인품과 정치력,경륜과 갈등관리능력을 보고 하는 말이다. 내가 아는 그분은 주민들에게 맞아 죽는 일이 있어도 홀홀 단신 마을에 들어가 끝까지 토론할 배짱과 자신감이 있는 분이다. 그러고도 끝내 설득되지 않는다면 과감히 계획을 접는 화끈함도 있는 분이다. 돈 선거를 개탄하며 삭발까지 단행했던 분이 업체의 로비에 흔들릴 리도 없다.

의령은 곽재우 장군과 의병의 혼이 살아 있는 곳이다. 김채용 군수가 직접 나서서 해결하지 않는다면, 관군에 맞선 백성이 복면을 쓰고 죽창을 들지도 모른다. 또한, 언론이 침묵한다면 자굴산과 칠곡천·내조천 변의 돌멩이들이 벌떡 일어나 외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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