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형 작가/대한민국에서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 여성들

제1화. 오정수.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록하는 사람 2018. 12. 29.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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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세상 어려운 질문 가운데 하나다. 필자는 행복에 이르는 답으로 ‘네트워킹’을 주목했던 바 있다. 이전 연재 글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에서 다양한 실천 사례를 소개하며 확신을 얻었다.

네트워킹 핵심은 ‘긍정’과 ‘공명’이다. 긍정적인 요소가 작동하면서 주변에 변화를 퍼트린다는 것이다. 이번에 연재를 시작하는 <대한민국에서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여성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공통점이 있다.

대한민국 네트워크 종결자들 연재 당시 타이틀 삽화.

아무도 진지하고 치열하게 살지 않는다.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진지하고 치열한 여성을 제외한 이유는 간단하다. 필자 스스로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게다가 그런 삶은 주변에 평범한 여성들이 모델로 삼기에도 버겁다. 즐겁고 재미있게 살면 일단 자기가 행복하다. 스스로 행복한 사람은 주변에도 변화를 일으킨다. 이 흐름이 가장 권장할 만한 지역운동 모델이다.

고백하는데 처음부터 여성을 주목하지는 않았다. 첫 연재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에 소개한 주인공도 모두 남성이었다. 그래서 이 글은 여성을 마주한 순간부터 시작해야 할 듯하다.


대한민국에서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 여성들 목차

제1화. 오정수.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2화. 박인혜. 예쁜 파마머리의 비밀

제3화. 김영례. 전화 한통이면 해결 끝

제4화. 박신연숙. 나는 무지 사랑스러워

제5화. 임예빈. 나는 시간을 잡는 소녀

제6화. 한영미. 토종 민들레 포자되어

제7화. 홍은정. 낯선 남성과의 몸싸움


제1화. 오정수.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역사회에서 시민사회 역량을 강화하고자 열정을 바친 여성이 있다. 그는 풀뿌리 보육운동, 주민참여예산 같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를 만났을 때는 서울시에서 받은 프로젝트인 에너지자립마을 사업이 한창이었다. 그와 한참 여성 정치 세력화 중요성을 이야기하다가 주제가 어머니로 넘어갔다. 활기차던 얼굴이 금세 일그러졌다.

“우리 엄마는 너무나 불행해요.”

전화만 하면 “죽겠다”로 시작해 아버지 얘기로 이어지는 레퍼토리, 고부갈등으로 말미암은 고생담으로 넘어간다. 막장 드라마에서 단골 소재다. 가부장적 가정에서 여성이 우위를 차지하는 방식은 여성끼리 갈등으로 그려진다. 여성은 남편이나 시아버지, 아들을 건드리지 않는다. 가정에 새로 들어온 여성, 즉 며느리와 치고 박는 모습이다.

내 부모도 그랬다. 이글의 주인공 오정수는 내 어머니다.

아버지는 몹시 권위적이었고 어머니는 그 가부장적 체제에 순응한 다른 어머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거리낌 없이 내뱉는 여성 비하 발언은 본능적인 반발을 샀다. 어머니가 딸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말을 하는 게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기를 희생하며 자식들은 모두 대학에 보냈고 덕분에 자식들은 좀 더 깬 사고를 할 수 있었다.

나는 부모 덕에 배웠고 사회활동을 했지만 더욱 벌여진 격차로 부모와 대화가 단절됐다. 그 시대 부모들이 겪는 아이러니다. 2007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 대화 주제는 계속 10년 전 이야기였다. 나 또한 내가 만난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 정의를 외치고 사회 변화를 추구했지만 자신은 어머니 앞에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갈등 해결 방법은 각자 사는 것이었다. 집안 일로 만날 때 잠시 불편한 대화를 견디면 됐다.

2013년 하반기부터 어머니는 아프기 시작했다. 현대기술로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어머니를 돌봤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총대를 메는 성격 때문이다. 어머니는 점점 걷기도 힘들어 했고 그러다 휠체어를 이용하게 됐다. 3년 동안 지옥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절망감을 토로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뭐 하냐.”

“진통제를 달라.”

병원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했고 어머니 건강은 계속 나빠졌다. 2016년이 되자 마약성 진통제를 최대치까지 복용했고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호흡도 힘들었고 심장이 좋지 않아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자 전신이 퉁퉁 부었다. 허리통증도 호소하며 10분 이상 앉아 있지를 못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다녔지만 희망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요양원에 가기 싫고 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 내 건강에도 이상 신호가 왔다. 그때부터 고민을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까.’

나는 어머니께 선택을 요구했다.

“놀다 돌아가실래요?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실래요?”

어머니는 ‘놀다 죽겠다’를 선택했다.

제주도 관광택시.

2017년 2월부터 관광 택시를 불렀다. 두세 시간 드라이브를 하자 어머니는 피곤을 호소했다.

“어차피 누워 지낼 것, 피로 풀면서 누워 있다고 생각 하셔라.”

어머니는 피로를 풀기 위해 일주일 동안 누워 있어야 했다. 내 일상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어머니는 그 일주일 동안 절망감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 시간은 내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관광택시를 불렀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 맛집을 검색했다. 카페, 미술관도 찾아다녔다. 주제별 관광 일정을 짜기도 했다. 일정 중에는 ‘5성급 호텔 조식 체험’도 있었다. 호텔에서 어머니를 ‘회장님’이라고 불렀는데, 돌이켜보면 어머니 자존감을 높여줬던 좋은 방법인 듯하다.

점차 몸이 회복되는 시간이 단축됐다. 일주일에 관광택시를 부르는 횟수가 세 번까지 늘어났다. 어머니를 더 오랫동안 지치게 할 방안을 찾아야 했다. 군말 없이 오래 누워 있을수록 내가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 해외여행으로 눈을 돌렸다.

2017년 3월 어머니는 휠체어를 타고 일본을 다녀왔다. 진통제를 복용하며 관광버스 안에서 보조의자까지 펴서 누워 다녔다. 일본을 다녀온 어머니는 2주 동안 누워 지냈지만 자신감을 얻었다. 이후 한 달에 한 번 외국으로 나갔다.

일본에서.

뉴질랜드에 갔을 때 만난 가이드는 유머감각이 뛰어났다. 그 덕에 어머니는 하루 열 번 이상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곤 했다. 저녁이 되면 그날 있었던 재밌는 일을 되짚으며 함께 웃었다. 그 사이 진통제 복용을 슬쩍 건너뛰곤 했다. 어머니는 눈치를 채지 못하고 그냥 잠들었다. 진통제 복용을 그런 식으로 줄이면서 8월이 되자 다리 붓기도 나았다. 약 복용량도 절반으로 줄었다.

놀기 시작한지 6개월 정도 지나자 어머니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됐다. 어머니는 숲과 나무에 빠져들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한평생 자연을 가까이 하고 살았지만 나무가 그토록 아름다운지 새삼 깨우쳤다. 즐거운 체험을 통해 여유를 찾으면서 그 아름다움이 보이게 된 듯하다.

친한 피디 추천으로 2017년 11월 아프리카로 갔다. 우리는 국립공원과 울창한 나무를 보러 다녔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무척 아름답다며 감탄했다. 지금도 어머니는 그 도시 이름을 종종 물어본다.

아프리카에서.

어머니는 일본과 싱가포르 장애인 정책에 감탄했다. 싱가포르 전역은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시설을 운영하는 시선도 훌륭했다. 싱가포르에서 유람선을 타고 도시 야경을 구경했다. 비장애인들은 유람선 가운데 의자에 착석하여 구경한다. 장애인은 뱃머리에 휠체어를 고정시켰다. 어머니는 뱃머리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물결위에 빛이 내려앉은 도시 야경을 감상했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머니는 우리나라 장애인 정책이 미흡하다고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선진국 시민에게 관용과 배려도 경험했다. 휠체어를 탄 어머니가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타나 손길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놀면서 자신에게 생긴 변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많이 어진 사람이 됐다.”

어머니가 2017년 한해를 보낸 소감이다.

“복잡했다.”

진통제를 끊은 덕에 어머니는 2018년부터 주간보호센터에 다닌다.

내 삶은 조금 더 편안해졌다. 이런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놀라곤 한다. 가장 어려운 여성운동이 어머니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애초에 어머니 변화를 원했던 것도 아니었다. 힘든 시간 속에서 내 삶이 편할 수 있는 길을 찾다가 노는 것을 택했다. 물론 지금도 어머니는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가부장적인 사고를 한다. 눈에 띄는 변화를 꼽자면 잘 웃는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내 일도 많이 못했고, 돈도 너무 많이 썼다. 현실적으로 비용을 따지면 내 방식은 누군가에게 권하기 어렵다. 전쟁을 겪었던 세대는 돈을 악착같이 모으기는 익숙해도 쓰기를 어려워한다. 우리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어머니가 동행했던 것은 막다른 골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는 특수성 때문이다. 만약 어머니가 건강했다면 그 고집을 꺾을 수 있었을 지 회의적이다.

싱가포르 뱃머리 야경.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즐거운 시간이 인간에게 끼치는 힘은 상당히 강력하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다니면서 여러 나라 사람을 만났다. 대부분 이렇게 말했다.

“저희 부모님은 건강하시거든요. 이렇게 어머님을 휠체어에 태워서도 여행을 오는데 저는 한 번도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갈 생각을 해보지 못했어요.”

이런 경험들 속에서, 나는 즐겁게 노는 것만으로도 사회운동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을 어떤 언어로 설명을 해야 할지 막막함을 느꼈다. 현장에서 뭔가를 느끼고 경험했을 때, 이게 해석이 가능해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고 또 다른 상황에서도 적용이 가능한 법이다. 동시에, 치열하고 진지한 방식이 아닌, 즐거운 방식으로 주변을 변화시키는 여성이 존재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 여성들 중에 누군가는 나에게 적절한 설명을 해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시에서, 농촌에서, 세대를 넘나드는 교류를 통해 즐겁게 사는 여성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만난 박인혜 씨는 인간이란 존재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를 안겨줬다.

(다음 제2화. 박인혜-예쁜 파마머리의 비밀)

글쓴이 : 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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